바야흐로 ‘위기의 시대’다. 그리스어 ‘분리되다’(Krinein)에서 유래된 ‘위기’(Crisis)란 개념은 본래 회복과 죽음의 분기점이 되는 갑작스럽고 결정적인 병세의 변화를 가리키는 의학용어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위기라는 용어는 사회과학적 의미로 더 많은 용례를 얻고 있다. 위기가 일방적 파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바로 새로운 대안을 향한 출발 및 기회를 동시에 내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한국사회는 민주주의를 기념하는 사업의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그 형체조차 남지 않은 채 갈가리 찢겨져 나가고, 주권자 민중이 정기바겐세일마냥 길게는 5년 짧게는 4년에 한차례씩 표 찍는 기계로 전락해버린 바로 오늘, 그 민주주의를 기념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민주주의란 표 찍는 문제를 넘어, 먹고사는 문제여야 한다. 민중의 삶과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더 이상 존립할 근거를 지니지 못한다.
한국민주주의의 위기의 한 가운데서 2008년 한국사회를 온통 뜨겁게 달구었던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가 솟아올랐다. 이 책은 원래 올해 중순 쯤 퇴고를 마칠 예정이었으나,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촛불집회로 인해 그 출간이 지연되었다. 촛불집회의 정치적 의미를 잠정적이나마 기록해 두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과학자로서의 정치학자의 운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지난 한 세기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활력소이자 견인차 역할을 했던, 세계경제의 대마(大馬)라 할 수 있는 미국경제가 자칫 붕괴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심각한 위기상황이라 하겠다. 미국경제를 위시한 세계경제가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개혁을 바탕으로 현재의 위기상황을 돌파하여 과거 전후 시대에 비견할만한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러한 대위기를 성찰의 기회로 좀 더 호혜적일 뿐만 아니라 평등한 국제정치경제질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이러한 전 세계적 수준의 경제적 공황에 준하는 위기상황이 눈에 띠게 회복됨이 없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인류는 그때 어떠한 정치적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역시 아무도 가보지 못한 말 그대로 전인미답의 길이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를 향한 위대한 도정의 서막이 될지 아니면 대재앙의 상호공멸의 나락으로 추락할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그러한 시대에 21세기 민주주의의 살아 있는 교본 내지 현장으로서 한국의 촛불집회의 경험이 큰 울림으로 정치적 영감을 줄 것임을 확신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촛불집회는 미래의 사가들에게 21세기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은 한국민주주의를 그 주어로 하고 있으며, 현재와 같은 위기 시대 이전의 한국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진보적, 민중적 해석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주의라는 일견 상반된 이론적 목표를 결합시켜 내보고자 했다. 이러한 목표가 잘 성취됐는지 여부는 독자제현의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제1부에서는 한국민주주의의 기원, 그 전개과정에 대해 다룬다. 제2부에서는 한국민주주의와 국가의 관계를 민족주의와 정치경제적 쟁점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제3부에서는 사회계급, 주체,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을 통해 한국민주주의 해석의 지평을 넓히고자 한다. 위기 시대 이전의 서술방식이 한국민주주의의 역사 해석에 그 주안점이 주어졌다면, 지금과 같은 위기 시대 이후의 한국민주주의는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정치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보다 이론적인 관심에 방점이 찍혀질 것이다. ‘위기의 시대 이후’(post-crisis),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격적 논쟁과 격렬한 토론이 예고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