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평론가 고미숙을 탄생시킨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출간 20주년 기념 리커버판
당대의 천재이자 대문호였으나 현대인에게는 아득하기만 했던 연암 박지원을 웃음과 우정, 노마드의 달인으로 새롭게 조명했을 뿐 아니라 들뢰즈의 사상으로 연암의 역작 『열하일기』를 재해석해낸 참신한 독법으로 ‘지금-여기’의 고전에 목말라하던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출간 20주년을 맞아 새로운 옷을 입었다. ‘20주년’이란 시간은 단순히 십진법으로 잘라내기 편한 숫자가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고미숙에게 새로운 공부의 장이 된 명리학(命理學)에 따르면 10년에 한 번씩 바뀌는 시절인연을 일러 대운이라고 한다. 즉, 10년마다 누구나 (어느 것이나) 또다른 운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출간된 지 20년을 맞았다는 것, 게다가 “아직도 현장에서 싱싱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이 책이 우리 시대의 ‘장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는 데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책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공간의 리듬을 밟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 ‘살아남았다’기보다 ‘다시 태어나’ 독자들과 새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밟아온 지난 20년의 운명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일파만파’라 해도 좋을 것이다. 지난 2003년 ‘고전 다시쓰기’라는 기획의도 아래 출간된 이 책은 ‘고전은 어렵다’라는 불변의 고정관념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책을 펼치자마자 연암 박지원을 실학자나 문장가가 아닌 ‘유머의 천재’로 자신있게 단언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게다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연암이 얼마나 ‘유머의 천재’인지 널리 알리고” 싶어서란다. 저자 고미숙의 바람은 의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출간 첫 해에만 수만 부가 팔려나갔을 정도로 독자들은 이 책에 열광했다. 기존의 인문서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고미숙만의 톡톡 튀는 구어체 문체로 그려지는, 우울증을 고치기 위해 저잣거리로 나서는 연암, 지배적 코드로부터 스스로 탈주하는 연암, 신분과 나이 고하를 따지지 않고 뜻이 맞으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연암, 똥거름과 기왓장에서 ‘문명’을 꿰뚫는 연암과 그러한 연암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는 『열하일기』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연암과 『열하일기』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물론이고, 단군 이래 한 번도 최대의 불황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출판계에 때 아닌 ‘고전 열풍’이 인 것은 고미숙의 이 책으로 인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미숙에 의해 다시 쓰여지기 전의 『열하일기』는 당대에는 누구나 읽었지만 (군주였던 정조까지도!) 함부로 읽어서는 안 될 불온서적이었고, 선대의 문집을 정리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이 후손의 의무였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손자(박규수)조차 공간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문제작이었다. 이후 번역과 공간이 이루어졌지만, 지난 100여 년간 아무도 읽지 않는 ‘고전’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물결과 파동의 시대, 21세기를 기다리고 있던 『열하일기』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이 고미숙이, 그리고 고미숙이 가져온 들뢰즈의 철학개념이 『열하일기』로 흘러들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되기·영토화·클리나멘·홈 파인 공간’ 등의 용어는 당연히 18세기 조선의 박지원의 것이 아닌,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연암의 사유와 들뢰즈의 개념어는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럽게 잘 흐르고 있다. 그 흐름 또한 이 책이 만들어냈던 ‘일파만파’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음은 물론이다.
20년의 시간이 채워졌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운명의 또 다른 마디가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리커버판’으로 다시 태어난 이 책에도 새로운 운명이 펼쳐질 터이다. 2012년 여름 저자는 다시 열하에 다녀오면서 “누구도 같은 길을 두 번 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같은 길을 두 번 갈 수 없음은 이 책의 운명도 마찬가지. 이 책을 따라 연암과 『열하일기』 그리고 고전으로 가는 독자들 또한 ‘아주 낯선 길’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