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국민을 벗어나 ‘대중’이 되면
강자를 끌어내리지 않고도 강자가 된다
여기 약자의 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두 약자가 있다. 첫 번째로 가진 자들의 소유를 정의롭게 나눠야 한다고 외치면서 싸우는 약자다. 이 방법은 권력을 인정하고 그 권력이 만든 질서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경우, 약자는 ‘국민’이 된다. 두 번째 약자도 있다.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를 만들어 권력과 가진 자의 소유를 무색하게 만드는 약자다. 디지털시대에 가능한 방법이다. 이때 두 번째 약자는 국민이 아니라 대중이다. _본문에서
이 책에서는 ‘국민’과 ‘대중’을 구분한다. 국민은 국가와 정부의 정책 대상이지만, 대중은 이 관점에서 벗어난 존재다. 국민으로 살아가는 길 앞엔 ‘모범’이 있을 뿐이다. 선생님 말씀 잘 듣는 학생, 시키는 일 잘하는 직장인, 정부 정책을 잘 따르는 노년층… 이는 바꿔 말하면 특별히 순하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학생, 주는 임금 이상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직장인, 별다른 복지 정책을 펴지 않아도 괜찮은 노인세대다.
이 ‘모범인생’이야말로 권력이 지향하는 정체성이다. 모범학생 뒤에는 일류학교와 스타강사가, 모범직장인 뒤에는 초일류기업이, 모범국민 뒤에는 정부와 정치영웅이 있다. 모범적으로 사는 사회는 소수의 스타, 일류, 영웅, 셀럽을 만든다(334쪽, ‘에필로그’). 저자는 우리가 왜 모범국민이 되지 않아야 하는지, 모범국민은 권력에게 어떻게 이용당하는지, 모범국민이 되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말한다.
지켜야 하는 것이 기후인가, 기후정의인가?
권력과 얽힌 전문가 집단을 경계하라
저자 강하단(본명 조재원)은 환경공학자이자 과학예술작가다. 현재 울산과학기술원(UNIST)에서 ‘과학인문학’과 ‘환경정의와 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교육, 정치, 경제체계 등 전 분야에서 다중 기호, 즉 다중 언어를 만들어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언어는 꼭 글이나 말이 아니라도 좋다. 소통에 쓸 수 있는 모든 도구가 언어이고 기호이다. 기호는 체계 맨 아래에 있다. 경제체계의 기호는 ‘돈’이고, 정치체계의 기호는 ‘법’이다. 교육체계에서는 ‘학점’과 ‘학위’다.
이 책에는 코로나19 팬데믹, 기후변화 위기, 불평등 등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저자는 우리 앞에 놓인 숱한 재난을 극복하려는 권력과 전문가 집단의 행보를 달리 바라본다. 권력은 과학과 얽혀 있고, 전문가 집단은 권력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팬데믹 시기 모든 리스크 판단과 결정이 국가와 정부 단위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한다. 개인 즉 국민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결정을 내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생존 문제로 다가온 기후변화 위기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이 ‘기후’인지 ‘기후정의’인지 다시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 기후위기를 강조하면서 탄소세 상품과 이익만 챙기는 세계기구와 일부 강대국을 경계하고, 권력을 잡은 정권의 성향에 따라 기후위기 과제의 중요도가 달라지는 현실을 냉정히 살펴보라고 말한다. 정부 중심의 정책에 목을 매는 형국에서, ‘대중 중심’의 움직임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리 높여 기후변화 위기를 외치는 궁극적 목표는 ‘생명’이지, 기후정의가 아니다.
세상이 이토록 복잡한데 언어가 하나일 수 없다
‘기호’가 변하면, 모든 것이 바뀐다!
제도, 정책, 정부를 바꾼다고 쉽게 바뀔 사회가 아니다. 경제 정책, 부동산 정책을 바꾼다고 세상이 바뀌는가? 교육부가 강도 높은 대학 개혁을 발표한다고 대학이 바뀌는가? 정부와 대통령이 바뀐다고 사회가 바뀌는가? 윗부분이 아니라 아랫부분이 변화해야 한다. 새로운 기호가 기존 질서와 병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현재 사회에서 사용되는 기호와 경쟁하지 않아야 한다. _본문에서
약자가 강자의 소유와 관계 없이 강해지기 위해, 대중이 국민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중으로 살기 위해 이 책에서 제시하는 것은 초월한다는 의미의 ‘메타(Meta)’ 개념이다. 다중 정부, 다중 권력, 다중 화폐, 다중 기호가 있는 메타도시, 메타국가다.
가령 경제체계를 이루는 ‘돈’을 살펴볼 때, 이 돈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돈이 유일한 소통 기호라는 것을 인정한 다음, 그 돈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다. 돈이 바뀌면 경제의 모든 것이 바뀐다. 경제 정책뿐 아니라 경제 법칙도 바뀔 것이다. 또 법이 바뀌면 정치적 시각 자체가 바뀐다. 대안이 없다고,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고 발목을 잡는 것은 기득권의 몸부림일 뿐이다.
이 책은 좀처럼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권력을 찾아내 “여기 숨었다!”라고 외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모범국민 되기를 능동적으로 포기하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상을 용기 있게 ‘선언’만 하면, 새로운 해법이 생겨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