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큰 얼굴인 이문영 교수가 자신의 삶을 총결산하는 저서를 상재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정의의 대원칙을 3·1운동의 <공약3장>에서 발견하여 이를 자신의 학문과 운동의 경험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잡았다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 ‘정치’라는 단어는 단지 기능적인 어휘로 통용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우리에게 정치는 정의의 구현을 넘어 메시아적 구원의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투표함 앞에서 두 줄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던 기억을 말하고 있는데(245쪽), 그는 민주화된 정권에서 어떤 공직도 맡지도 않았고 더더욱 개인의 영달이라곤 꾀한 일이 없다. 그런 그가 정치의 한복판에서 흘린 눈물의 순수함이란 곧 민주화 세대의 질곡을, 그리고 투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표상한다.
도리 없이, 독자는 이 책의 곳곳에서 눈물을 만나게 된다. 이를테면 검찰청의 엘리베이터에서 포승줄에 묶인 저자를 맞닥뜨린 출근길 — 아마도 제자였을 — 어느 검사 또는 수사관의 붉어진 눈… 엄혹했던 군사독재를 기억하는 세대들은 아마도 그 눈물에 자동으로 동조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웃음에 관한 일화도 있다. 난방이 안 되는 겨울의 교도소는 무척 추웠고 어느 날 밤에 추워서 잠을 깼는데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는 것이다(49쪽).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일반적인 ‘쾌락’과 대비되는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곧 정의를 좇는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일락의 한 종류일 것이다.
저자의 기억 속에서 1970년대는 1980년대보다 더 무서운 시대였다.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죽어간 사람들도 숱하게 많았다. 그 모든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한 민주주의가 단지 형식적인 절차상의 민주주의로 환원되어 버린 현실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명박 정부는 문민정부의 뒤를 잇는 이상 최소한 우악스러운 정치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회에서 스승의 구실을 해야 할 학교와 교회, 언론들이 과연 맡은 바 제 구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무척 회의스럽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의 마무리 지점에서 — 바로 그런 까닭에 이상주의자로 치부되는지 모르지만 — 저자는 단순한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을 꿈꾼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3·1운동으로 돌아간다.
민주 문명하의 나라 안에서 서민에 대한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지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군사주의적 패권주의가 성행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혁하고자 하는 용기 있는 지성과 정치가가 결핍될 수 있다. 이쯤 되면 민주 문명을 초월하는 새로운 문명이 요청된다. 본서가 바로 31운동을 통해서 한국민이 열 새 문명을 모색하는 책이다. 이 단계에서 민주 문명에서의 타락을 극복할 수 있는 통치자가 나올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새 문명에서의 공직자가 되는 것이다(385쪽).
이 새 문명에서의 공직자는“믿을 만하며, 시시비비를 가리며, 사양할 줄 알며, 약자를 긍휼히 여기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사람이어야 한다.
이 책의 3부는 그 제목이 ‘환희로서의 행정학’이다. 가위, 교도소의 냉골에서 추위로 눈을 뜨면서 미소를 지었던, 오로지 이문영 교수만이 붙일 수 있는 제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