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로탱화의 탄생
영혼을 천도(薦度)하는 불교의식에 사용된 감로탱화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동시에 표현된 조선시대의 불교회화이다. 감로탱화의 서사적 회화는 ‘신(神)들의 그림 이야기’가 아니다. 시ㆍ공간적 층위와 존재론적 인드라 망 속에 놓인 ‘인간들의 그림 이야기’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반응의 한 양상을 불교의례를 빌어 표현한 감로탱화는 육도중생이 겪어야 하는 업의 굴레에서, 불ㆍ보살의 자비가 깃든 ‘감로’로 구제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도상화한 그림이다. 이는 육도윤회가 반복 중인 현세의 삶을 불교의식을 통해 구원할 수 있다는 조선시대 불교의 신앙체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감로탱화가 주는 교훈은 그림이라는 종교적 상징 매체를 통해 중생들이 수행하는 신앙행위의 국면을 설명함과 아울러, 관람자에게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반추하게 만든다.
감로탱화가 탄생한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의 사회, 경제적인 토대가 완전히 박탈된 시대였다. 교단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고, 산간총림으로 축소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종교적인 요구로서 천재지변에 대한 구원의 손길과, 인간의 무병장수와 사후명복을 비는 행위 등은 당시의 지배이념이었던 유교적인 정치윤리로는 해결될 수 없었다. 비록 조선시대 불교의 정치ㆍ사회적 영향력은 축소ㆍ억제되었지만, 종교적 차원의 불교의례와 신앙만은 전적으로 말살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불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서사적 구성과 도상의 변화
감로탱화는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400여 년간 꾸준히 제작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은 66(214~218쪽 ‘<표 16> 조선시대 감로탱화 목록’ 참조)점인데, 이들을 통해 감로탱화에 구현된 시기별 불화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감로탱화의 서사적 구성은 불교의 우주관을 삼계(三界)로 집약해 놓은 상단ㆍ중단ㆍ하단이라는 삼단의 공간성을 확보하면서도 과거(전세), 현재(현세), 미래(내세)라는 삼세의 시간 이동을 수직적인 상승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감로탱화의 상단은 불ㆍ보살의 세계, 중단은 재단과 법회 장면, 하단은 윤회를 반복해야 하는 아귀 등 중생의 세계와 고혼이 된 망령의 생전 모습이 묘사되어 욕계에서 색계, 무색계로 펼쳐진다. 이러한 구조는 조선시대 불교의례의 삼단법(三壇法)과도 동일한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감로탱화에 나타난 도상의 변화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16~17세기가 초기양식인 성립기였다면, 18세기는 활발한 감로탱화의 조성으로 다양한 도상의 출현과 구성의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그리고 19~20세기 초까지는 매너리즘에 빠져 화면상의 도상과 구성이 도식화되는 경향을 띤다.
현존하는 감로탱화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589년에 제작(「약센지 소장 감로탱화」)되었다. 대부분은 조선시대 후기의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기(前期)의 것이 많이 손실된 탓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후기에 감로탱화가 크게 성행한 탓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한편,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감로탱화에서 하단은 18세기나 그 이전 에 볼 수 없었던 인간군상이 새롭게 전개된다.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조성된 감로탱화에서는, 육도를 기본 하단의 도상으로 설정했던 전 시대와 달리 오직 아귀와 인간도로서만 하단을 메우려는 듯한 양상을 띤다. 이는 곧 화면에 펼쳐진 인간생활상의 다양한 확대를 의미한다. 가장 주목할 장면은 19세기의 감로탱화이다. 주로 가족단위의 떠돌이 행상이나 보부상을 중심으로 개별적인 서사구성으로 표현하던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와 달리, 19세기에는 시장이라는 새로운 넓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각종 상행위 장면을 과감하고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감로탱화의 하단이 비록 당시 풍정을 민감하게 반영했던 일반 회화의 풍속 장면에 비해 늦게 그려지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을 소재로 여러 모습을 반영한 하단이 현실에 기초한 도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의 그림이 도상적으로 획일화된 경향은 있지만 현실성을 획득하여 화면에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감로탱화와 영화 「매트릭스」의 가상공간, 풍속화, 민화
1장에는 조선시대 감로탱화의 조성배경과 감로의 의미를 알아보고, 감로탱화에 나타나는 화면 구성을 삼단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감로탱화의 중심 경전인 소의 경전에 대하여 살펴본다.
2장에서는 감로탱화에 나타난 시간성과 공간성의 상호관계와 그것이 갖는 의의를 찾아본다. 감로탱화에는 불교의 우주관을 삼계三界로 집약해놓은 상?중?하단의 공간성과 삼세의 시간 이동으로 본 도상의 특징이 있다. 그림과 관련된 신앙의례절차를 그림의 전개방식에 맞추어 시간을 축으로 공간 이동하는, 마치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3장에서는 감로탱화의 전개 과정을 조형적인 측면에서 다루되, 시간성과 공간성이라는 관점으로 화면 구성을 들여다보았다. 예컨대 동양화에서 본 시?공간의 표현법인 ‘삼원법(三遠法)’과 서양화에서 본 시?공간의 표현법인 ‘원근법’, 그리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감로탱화에 구현된 가상공간을 영화 「매트릭스」(1999)의 가상공간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본다. 이러한 방식은 종교적인 전통회화 매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하는 것으로, 현대예술의 다양한 이론이 성숙?발전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감로탱화의 예술적 의의와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도 함께 짚어본다.
「보론」으로, 감로탱화에 나타나는 풍속화와 민화를 들여다본다. 즉 감로탱화에서 반영된 김홍도의 「무동」, 신윤복의 「월하정인」, 김득신의 「대장간」, 유숙의 「대쾌도」 같은 풍속화와 모란도, 책가도, 십장생도, 까치호랑이 같은 민화와 동일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감로탱화에는 당대의 사회상뿐만 아니라 유행한 회화까지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감로탱화의 현재적 의미
이 책의 미덕은 감로탱화에 구현된 시·공간성의 조형미에 대한 색다른 해석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서양의 미술과 영화를 통해 감로탱화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그 현재적 의미 부여로 현대예술과의 연계성까지 모색한다. 그런 만큼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도 감로탱화에 표현된 조형적 자원을 적극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감로탱화는 조선시대 후반에 왕성하게 제작되었지만, 시간성과 공간성의 상상력을 화면에 구현시킨 작품으로서, 현대예술에도 그 작의(作意)는 활용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시간성을 공간화한 서사적 화면구성과 그 동시성의 화면 속에 구현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거대한 사고체계는 새로운 매체예술을 탐구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추구하는 현대예술의 창작에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앞으로, 감로탱화는 더 다양한 시각에서 새롭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236쪽)
저자는 불자로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불교적 세계관에 바탕한 작품세계를 일궈왔다. 그리고 불화인 감로탱화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이런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되었다. 한 작가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이 작품이라면, 이 책은 조선시대 감로탱화의조형성을 보여주면서 저자의 작품세계의 뿌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불자로서의 본격적인 불화 공부가 다시 작품세계를 기름지게 하는 자양분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감로탱화 연구가 곧 자신을 위한 공부로 승화된 격이다. 감로탱화는 한 편의 거대한 인생 지침서이자 조선시대의 역사와 회화를 기록한 ‘역사화(歷史畵)’이기도 하다. 따라서 감로탱화를 공부하는 일은 곧 우리 역사를 배우는 일이자 신산한 인간사를 음미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