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으로 꼽히고 세계의 수많은 독자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명상록〉은 공익을 위한 일이라면 싸우지 않고 양보하고, 옳은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고, 진실이 아니면 말하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꾸짖고 지금 바로 죽을 수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사색과 성찰의 ‘자성록(自省錄)’이다.
이 책은 스토아 철학의 사상을 강조한 배움, 인생, 운명, 죽음, 인간의 본성, 우주, 자연, 도덕 등 12권의 장과 개별적인 단상들로 구성된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인생 지침서다.
그가 로마를 통치하던 시대는 게르만족, 스키타이족 등 외적의 침략과 변방의 소란 등 외부로부터 위협이 계속되고 페스트와 티베리스강의 범람으로 오랜 기간 전쟁과 질병, 기근과 시련을 겪으며 야만족과 카시우스의 반란으로 소환 명령을 기다리듯 오랜 기간 그의 영혼은 지쳐 있었다.
그는 전장에서도 손에 책을 놓지 않고 진리를 탐구하고 〈명상록〉을 쓰면서 고독과 유랑의 시간을 달래며 그 어떤 것도 자기가 최선을 다해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적 영혼은 우주 로고스의 일부분이고 인생의 목적은 이러한 우주의 신성한 목적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고 인간은 신의 섭리를 거역하지 말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자연을 중시하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무조건 복종만을 요구하던 시대 노예로 살기보다 철학자로 죽기를 택하고, 우월한 정신만이 열등한 육체의 노예가 되지 않으니 지금 바로 죽는 사람처럼 미래를 덤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의무를 수행하며 인간답게 행동하라고 한다.
옳은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고 진실이 아니면 말하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꾸짖고 지금 바로 죽을 수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자신을 황제가 아니라 홀로 선 고독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 고백록을 읽어달라고 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철학과 사색의 일기이다.
-출판사 리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는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안니우스 베루스는 로마의 귀족이었으며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는 집정관 카르비시우스 투루스의 딸로서 교양 있고 경건하고 자애로운 부인이었다. 베루스 집안은 원래 스페인에서 살았는데 마르쿠스가 태어나기 1백 년 전부터 로마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 안토니우스 베루스는 총독 · 집정관 · 원로원 의원 등의 요직을 지냈다.
마르쿠스는 여덟 살 때 아버지가 죽자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도 그가 어릴 때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여 학교에 다니지 않고 훌륭한 가정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소년 시절은 행복했다. 그는 공부에 열중했으며 진실하고 성실했다. 당시 로마 황제는 하드리아누스였다. 황제는 소년 마르쿠스를 사랑했으며 그의 이름인 Verus를 Verissus(진실한 자)로 불렀다. 마르쿠스의 숙모 파우스티나와 그녀의 남편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르쿠스를 양자로 맞아들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라고 이름 붙여 주고 그들의 후계자로 삼았다. 마르쿠스는 이때부터 미래의 황제로서 통치하는 법과 황제로서 해야 할 일들을 배웠다.
마르쿠스는 26세 때 양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했다. 마르쿠스와 파우스티나 사이에는 13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아들인 코모두스와 4명의 딸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을 마르쿠스로부터 모두 앗아갔다. 161년 마르쿠스의 양부인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죽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제위는 탐탁한 것이 아니었다. 철학이 그에게 위안이며 종교였다. 마르쿠스는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동생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자기와 함께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하여 로마는 역사상 처음으로 동시에 두 사람의 황제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끊임없이 전쟁을 겪었다. 그 전쟁들은 동부 속국들의 반란과 중부 유럽 게르만인의 이동에 기인한 것이었다. 161년부터 166년까지는 파르티안전쟁이 있었는데 이때 마르쿠스의 의동생 루키우스 베루스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승리하고 돌아왔다. 그때 페스트가 로마 전역을 휩쓴 것도 이 원정의 결과였으며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때 티베리스강의 범람으로 로마는 엄청난 곡식을 잃었다. 마르쿠스는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궁정의 보물들을 팔아야만 했다.
167년 의동생 루키우스 베루스가 죽자, 그는 이후 13년 동안 혼자서 로마를 통치했다. 그 후 아시아의 카시우스라는 자가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자신을 황제라고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마르쿠스는 아시아로 향했다. 그 후 카시우스는 부하에게 살해되고 반역자들을 관대하게 대해 주었다. 이 원정 기간에 그와 함께 갔던 아내 파우스티나가 죽고 다시 다뉴브강 지방으로 돌아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기에 힘썼다. 그의 영혼은 여러 가지 수난과 전쟁에 시달려 ‘소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지쳐 있었다. 그는 그곳에 있는 동안 〈명상록〉을 쓰면서 고독과 유랑의 시간을 위로했다. 그에게 이 〈명상록〉은 철학 일기였다.
그 후 북방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마침내 페스트가 그를 덮쳤다. 그는 며칠 동안 앓다가 180년 3월 17일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 오히려 전염병에 걸린 사람과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59세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남긴 〈명상록〉은 그가 남긴 철학적 일기이며 자기의 사상과 묵상 그리고 권고(훈계)와 신념을 비망록의 형식으로 기록해 놓은 그리스어로 쓰인 책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을 때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책이 로마 황제가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자성록(自省錄)’, 즉 자기 성찰의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서 ‘당신’이라고 부르며 꾸짖고 위로하는 대상은 독자들이 아니라 황제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