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사地方史나 국사사國家史의 일부로서가 아닌
지역의 관점에서 경남 지역 근현대사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지역 역사서의 부재는
지역 소멸의 위기에 일조한다.
이 책은 기존의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한 역사 서술이 지역의 현대사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지역 현대사에 대한 서술의 부재는 그 자체가 지역의 실정을 이해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모든 작업에서 장애가 된다. 이는 단지 인식론적 공백에 머물지 않고 지역에 기반한 연구를 도외시하는 관행들로 이어져 오늘날 지역 소멸의 위기에 일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이러한 인식 아래 지역에 기반한 역사 쓰기와 근현대사 역사 교재의 필요성에 저자들은 뜻을 모았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11편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책의 전반부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 시기를 관통하는 주요 사건을 통해 경남 현대사와 시공간이 구조화되는 과정을 살핀다면, 후반부는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경남에서 전개된 사회운동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먼저 1부는 ‘사건으로 보는 경남 근현대사’라는 주제로 6편의 글을 싣는다. 대표적인 전국사건이었던 3·1독립운동부터 경남 진주를 그 시발(始發)로 하는 형평운동,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이주한 합천 주민들의 원폭 피해와 경남에서 끌려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문제 해결 역사, 한국전쟁기 전개된 민간인 학살과 국가 주도 산업화의 역사가 그것이다. 2부는 ‘경남의 사회운동과 지역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5편의 글을 싣는다. 농민운동, 민주화운동, 여성운동, 교육운동 등 한국사회 및 민주주의를 일구는 데 기여한 경남 사회운동의 역사를 여러 주체운동과 부문운동의 관점에서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간 일제강점기 부산, 울산, 경남의 항쟁의 기억을 다룬 역사서나 경상남도 차원에서 편찬된 역사서 『경상남도사』가 있었지만, 특정한 시공간에 제한된 서술은 경남에서 전개된 근현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폭넓게 아우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지자체 차원에서 제출된 지방사는 국가사를 설명하는 보조적 맥락에서 쓰여 지역의 역사와 변동을 이끌어낸 행위 주체와 사회구조에 관한 관심은 미미하다. 이러한 인식론적 공백은 자본과 국가 권력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 현대사에서 지역이 점하고 있는 주변부적 위치를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회적이고 인식론적인 공간으로서의 ‘지역’
그러나 국가사나 중앙권력 중심의 역사 기술에서 지역사가 공백으로 남겨져 있다고 해서 지역 자체가 ‘빈 공간’일 수는 없다. 지역에는 사람이 있고 관계가 있으며, 그러한 한 생활세계로서의 지역은 연대성을 경험하는 모태이자 핵심 단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생활세계로서의 지역이든 주변부로서의 지역이든, 지역은 보통 사람들의 노동과 일상이 자리한 삶의 터전이자 존재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역’은 행정 구역상의 지방이나 물리적인 공간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이고 인식론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또한 지역에서 구조화되는 개인의 삶은 언제나 국가적·지구적 수준의 힘과 연결되어 있기에, 지역은 공동체·국가·세계가 교차하는 탄력적인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경남은 인권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형평운동의 발원지였고, 일본과 근접한 지리적 조건상 일제강점기 가장 많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양산되었을 뿐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한 연대 운동 또한 여느 지역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곳이다.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어디든 예외 없이 존재하지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의 전형이 된 이른바 ‘거창학살’ 유족들의 끈질긴 운동이 시작된 지역이 바로 경남이다. 4대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두 축을 차지하는 3·15의거와 부마항쟁의 발원지인 동시에 국가산업단지 설립을 동반한 한국의 산업화와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물꼬를 튼 마창노련의 역사가 쓰인 곳 또한 바로 경남이다.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피해의 역사성과 끈질기게 이어온 운동성이 경남이라는 시공간에 공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