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이후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으로
모든 사람의 생명력과 지혜에 축복을 빌다
시공사 세계 최초 루이즈 글릭 시집 전권 번역 출간!
‘목소리들’을 계속 존중하고 싶은 시인의 바람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면서 글릭은 “친밀하고 사적인 목소리를 계속 존중”하고픈 바람을 내비쳤는데, 시인이 지속적으로 몰두한 죽음과 상실의 문제들, 덧없는 삶의 애가들은 친밀하고 사적인 목소리 속에서 그 힘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힘이란 것도 어떤 낙관이나 희망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다만 서로 목소리를 나누면서 전하는 소소한 위로와 전달에 더 가깝다.
글릭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도 늘 감추며 이야기하는 시인이라, 그 느낌이 마지막 시집까지 계속된다. 시인은 어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어떤 때는 남자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아이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하느님이 어떤 때는 정원사가, 어떤 때는 누구도 눈길 두지 않는 풀이 되다가 또 어떤 때는 냉정한 비평가가 되지만, 그 모든 가면 사이로 드러나는 자기 이야기를 지울 수 없다. 모든 목소리는 시인 자신에게로 모아지고, 그 목소리는 다시 시를 읽는 우리 각자의 목소리로 자연스레 바뀐다.
마지막을 향해 가는 시인의 깊이
시인의 마지막 시집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에는 죽음에 대한 온갖 암시와 후회, 과거를 돌아보는 마음, 미래를 바라보는 마음이 우울하게 섞여 있다. 짧은 시, 대화체의 긴 시가 고루 섞인 16편의 시가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어떤 행로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 행로는 시인의 것이기도 하고 독자의 것이기도 하고, 이 지구의 마지막 행로이기도 하다.
죽음을 앞둔 노인의 것인지, 어린아이 같이 남아 있는 인간의 영혼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은 목소리는 시인 글릭이 만년에 도달했을 어떤 심리적인 깊이를 잘 보여 준다. 인간 심리의 복잡성과 관계의 미묘함이 삶과 죽음, 사랑과 기다림, 희망과 불안,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대화와 서술로 엮여 있다.
마지막 시집을 통해
모든 사람의 생명력과 지혜에 축복을 빌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작품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은 해마다 겨울이 오면 노인들이 숲으로 가는 이야기다. 노인들은 숲에서 이끼를 모으고 이끼를 삭히며 힘든 겨울을 난다. 힘든 시절의 힘든 이야기다. 삭힌 이끼로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하고, 예쁜 이끼로 분재를 만들기도 한다.
영어 제목 ‘Winter Recipes from the Collective’는 여러 가지로 읽을 수 있는데, ‘집단에서 온’이라고 하지 않고 ‘협동 농장의’라고 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다.
이 시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몰고 오는 위기 속에서 반복되는 인간 노동이 갖는 의미를 그린다. 시절을 가늠하기 힘든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동으로 안간힘을 쓰는 인간의 노력이 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의 추위를 어떻게 이기는지 그리는 시다. 노동이 꽃피우는 어떤 것, 인내와 공동의 힘, 협력이 그나마 추락하는 이 세계를 지탱하고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지, 글릭은 개인의 재능, 혹은 독단적인 행위보다는 함께함으로써 의미가 살아나는 생명력과 지혜를 강조했다.
21세기 노벨문학상 첫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
2020년 루이즈 글릭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시문단에서는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2000년 이후 여성 시인으로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1909년에 〈닐스의 모험〉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최초 여성 작가 셀마 라겔뢰프 이후 16번째이고, 1996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이후 두 번째 여성 시인이다. 한림원 위원인 작가 안데르스 올손은 “《야생 붓꽃》(1993)에서 《신실하고 고결한 밤》(2014)에 이르기까지 글릭의 시집 열두 권은 명료함을 위한 노력이라고 특징지어진다”고 했다. 덧붙여 글릭의 작품 세계를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비교하며 “단순한 신앙 교리(tenets of faith)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엄정함과 저항”이라고도 표현했다.
루이즈 글릭은 50년 동안 미국 시 문단 중심에 선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그래요, 기쁨에 모험을 걸어보자고요 / 새로운 세상의 맵찬 바람 속에서”라는 구절이 있는 시 〈눈풀꽃〉만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는 현대 문단을 대표하는 서정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퓰리처상 · 전미도서상 · 미국 계관 시인 · 국가인문학메달 · 전미비평가상 · 볼링겐상 · 로스앤젤레스타임스도서상 · 월리스스티븐스상. 그리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그녀의 작품은 우아함, 냉철함, 인간에게 공통적인 감정에 대한 민감성, 서정성, 그리고 그녀의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난 거의 환상에 가까운 통찰력으로 지속적으로 찬사를 받는다. 2023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시공사의 루이즈 글릭 전집 프로젝트
2020년 노벨문학상 작가로 루이즈 글릭이 호명된 후, 한국 유수의 문학 전문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루이즈 글릭 시인 작품 번역 출간에 경쟁을 올렸다. 2021년 1월을 기준으로 시인의 시집 전체는 시공사가 맡아 번역 출간하는 계약을 하게 되었고, 2022년부터 그녀의 대표 시집 《야생 붓꽃》, 《아베르노》, 《신실하고 고결한 밤》, 《맏이》, 《습지 위의 집》, 《목초지》,《새로운 생》, 《내려오는 모습》《아킬레우스의 승리》,《아라라트 산》을 순차적으로 출간하면서 문학 독자들로부터 호평받았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까지 시인이 손에서 놓지 않았던 한국어판
시공사와 루이즈 글릭은 2021년 판권 계약을 완료한 후부터 마지막 시집의 출간까지 긴밀히 소통해왔다. 시인은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자신의 시어를 고스란히 잘 전달해줄 단 한 명의 옮긴이를 함께 선정하고자 하였고, 긴 논의를 통해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미문학을 가르치는 정은귀 교수가 이 작업을 맡았다. 영미시를 우리 말로 옮기면서 한국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여 알리는 일도 병행해온 교수의 이력과, 정은귀 교수가 국내에서 손꼽히는 루이즈 글릭 연구자라는 점이, 언어의 장벽을 걱정하는 글릭의 마음을 안도하게 했다. 정은귀 교수와 시인은 시어의 번역과 뉘앙스를 두고 치열하게 질문을 주고받았다. 시어뿐 아니라, 시집 전권의 컬러에도 의견을 보태는 등, 한국 독자들에게 자신의 세계가 온전히 가닿기를 바랐다. 마지막 시집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까지의 의견을 주고받은 지 사흘이 지난 10월, 시인의 부고 소식이 전해졌다.
루이즈 글릭의 시 세계가 온전히 옮겨진 국가는 한국이 유일
2020 노벨문학상 발표 후 루이즈 글릭의 시집은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이중 시인의 시집 전권을 온전히 출간한 출판사는 시인이 몸담은 미국을 제외하고 한국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