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풍수로 풍수적 결함을 극복하다
#마음의 눈으로 만들어낸 명당
조선 후기에는 풍수가 수도와 지방 도시(읍치), 궁궐과 관아, 마을과 집, 무덤 등 모든 곳의 터잡기에서 권위나 위엄을 표현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양반 마을과 읍치 중에서 풍수의 명당터에 자리 잡지 못한 곳이 많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 책에서는 주산, 좌청룡, 우백호, 안산 각각을 풍수점수 25점을 부여했다. 네 요소 모두를 갖추고 있으면 100점, 세 요소만 갖추면 75점, 두 요소만 갖추면 50점, 하나만 갖추면 25점, 하나도 갖추고 있지 않으면 0점으로 보았다. 명당터에 자리 잡지 못한 경우 부족한 부분을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보충하여 풍수점수 100점의 명당터로 만들고자 했는데 이를 비보풍수(裨補風水)라 한다. 그래서 명당터에 자리 잡지 못한 경우 예를 들어 주산과 좌청룡은 있는데 우백호와 안산이 없으면 우백호 부분에 비보숲을 조성하고 안산 부분에 인공 산인 조산(造山)을 만드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심지어 풍수점수 0점인 곳을 100점으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풍수 형국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빵점 고을을 100점짜리 명당 고을로 만들다
풍수점수 빵점짜리 고을이 의외로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상주, 충주, 청주, 원주, 전주, 나주 경주, 강릉을 사례를 살펴보았다. 이렇게 유명한 고을이 풍수점수 빵점이라니 믿기 힘든 사실이다. 가장 흔한 곳은 풍수점수 25~75점짜리 고을이었다. 포천, 파주, 부평, 김화, 평창, 청양, 음성, 금구, 장성, 개령, 진주다.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고을이 아니라 우연히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런 고을들은 풍수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비보풍수를 이용해 100점짜리 명당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해동지도나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에 나와 있는 고을지도를 통해 내용을 확인해보고 그 이유를 분석해보았다.
#명당 고을을 거부한 사람들
대부분의 고을이 100점짜리 명당은 아니었지만 20~30% 정도의 고을은 100점짜리 명당이었다. 그런데 이런 고을들은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읍치를 옮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명당터를 반대한 사례도 있었다. 대표적인 두 군데를 살펴보았다. 낙안읍성과 보령읍성이다. 나라에서 옮기라고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사람들이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탄원서까지 올렸다. 하지만 탄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