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전세 보증금, 월세 보증금은 어떤 의미입니까?
‘빌라 왕과 전세사기’. 수백 명, 수천 명의 세입자의 보증금을 받아 여기저기 돌려막으며 부당이득을 빼돌리다가, 결국 수많은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대형 참사. 한꺼번에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들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일이 터지자 언론과 정치권이 주목하기 시작했지만, 참사의 전조는 몇 년 전부터 나타났고 이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몇 년 전부터 나왔다. 권지웅도 목소리를 내는 주인공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20대 대학생 시절, 너무 비싼 월세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며 기숙사 증축 운동을 시작했다가, 동료들과 함께 아예 빌라를 통으로 얻어 대학생과 청년을 위한 사회주택을 공급했다. 2023년 현재, 30대가 된 그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상담을 해주며 전세사기 관련 입법 활동을 하다가, ‘아예 정치하기’를 준비하고 있다.
30대 중반에 정치를 시작한다고 하면 ‘너무 이르다’, ‘너무 어리다’와 같은 평가를 듣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대학생에게 비싼 월세는 삶의 문제이며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라면 권지웅은 이미 20대부터 10년 넘게 정치를 해오고 있는 셈이다. 30대 중반으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전세 세입자로 살고 있기에 전세사기 문제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다. 중요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를 벌써부터 하고 있어왔지만, 더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로 정치를 넓혀가는 것이 목표다.
사서 쓰는 사람과 빌려 쓰는 사람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에, 정치는 비슷한 종류의 삶의 문제를 겪고 있는 이들을 대변한다. 그래서 누구를 왜 대변할 것이며, 어떻게 대변할 것인가는 정치의 고민이다. 권지웅은 책에서 ‘빌려 쓰는 사람들을 대변해야 하는 이유’와, 그 방법이 반드시 ‘민주주의’여야 한다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공부와 취업을 위해, 일터로 출근하고 가족을 부양하려고 많은 이들이 주거를 빌려 쓴다. 원룸과 고시원, 반지하와 옥탑방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 자신이 가진 대부분의 자산을 전세 보증금과 월세 보증금으로 맡기고 집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는 이렇게 빌려 쓰는 사람들을 ‘과정에 있는 시민’으로 다루었다. ‘내 집 마련’이라는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사람들, 즉 빌려 쓰는 단계에서 벗어나 사서 쓰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임시적이고 과도기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로 여겼다. 이런 이유로 사서 쓰는 사람들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들, 즉 ‘내 집 마련’과 ‘내 집의 가치 지키기’와 관련된 정책은 경쟁적으로 쏟아져 온다. 반대로 빌려 쓰는 사람들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는 임시적이고 과도기적 상태라는 전제로 마련되었다. 전세사기 사태도 결국 빌려 쓰는 사람들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터졌으며, 대책을 마련하는 국면에서도 임시적 조치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 사서 쓰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가 늘어나며, 심지어 서울과 수도권이 팽창하던 시기에는 유효했지만, 모든 것이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2023년에는 사서 쓰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 삶의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지웅은 한국 사회의 바뀐 상황에 맞는, 빌려 쓰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주장한다.
그러나 대화와 토론보다는 혐오와 배제가 익숙해지고, 갈등을 타협으로 풀기보다 공존이 불가능한 적으로 규정하려는 생각과 행동이 흔해지고 있다. 이는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문제는 민주주의 수호의 맨 앞에 있어야 할 정치의 영역에서조차 보인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빌려 쓰는 사람들의 정치는커녕 평범한 수준의 정치도 불가능함을 이야기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과, 2023년 현재와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막는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
주거, 청년, 정치, 민주주의
그리고 거의 모든 것
권지웅은 책에서 전세사기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지게 된 것에 피해자들과 함께 분노하고, 주거권 운동가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당장 서두를 대책과 반드시 마련해야 할 궁극적인 대책을 제안한다. 대의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그리고 미래 시민이 아닌 현재 시민으로서의 청년을 대표하기 위한 청년 정치에 대한 당위와 비전 또한 풀어놓는다. 또한 2023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식적인 수준의 민주주의조차 훼손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엄중한 비판을 던진다. 그러나 우리 민주주의가 다시 상식을 되찾을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이 있음을 자신한다. 자신감의 근거는 역시나 민주주의가 가진 힘, 그 힘을 담고 있는 시민들, 마지막으로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나 희망을 그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인 저자 자신에 대한 믿음에 있다는 것을 묵직하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