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분석론’으로서의 『시학』
철학이 만학(萬學)의 여왕으로 학문의 패권을 차지하던 시기(특히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에 철학은 거의 모든 주제를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스 철학은 정치, 학문, 도덕, 자연, 예술, 역사, 언어 등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유럽에서 다양한 개별 학문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시 역시 철학이 탐구하는 수많은 주제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철학의 이론적 분석의 수많은 대상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시인이 공언하는 지혜의 실체를 공개적으로 폭로했으며, 플라톤(Platon)은 『국가』 제10권에서 예술로서의 시가 지향해야 할 모방의 최선과 차선의 형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의 이러한 분석적 태도를 이어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시를 창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에 예술로서의 시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뤼케이온에서의 『시학』 강의를 통해 그의 제자들을 훌륭한 시인으로 육성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자들을 시 고유의 숭고한 목표와 인간학적 가치에 대한 인식으로 안내하고자 했다. 그의 『시학』은 시인의 관점에서 시의 제작의 원리를 밝히는 ‘시 제작론’ 또는 ‘시 창작론’보다는 철학자의 관점에서 시의 본질을 천착하는 ‘시 분석론’에 가깝다.
『시학』의 전체 구성과 내용들
『시학』은 총 2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의 전개의 ‘내용적’ 완결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저술의 처음과 끝은 적어도 저술의 ‘형식적’ 완결성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저술 전체의 목표를 제시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예술의 일종으로서 시는 그 자체로 무엇인가? 무엇이 시를 예술로 만들며, 시가 무용이나 조각이나 회화 등의 예술과 공통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 예술 자체에는 어떤 개별적 종류가 있으며, 각각은 어떤 고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어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부분 중 가장 중요한 ‘구성’은 어떻게 예술적으로 조직되어야 하는가? 그 외에도 시 예술과 관련해 어떤 비판들이 제기되고 또 해결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소기의 목표 달성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면서 『시학』을 마친다. “비극과 서사시에 대한 우리의 논의, 즉 그것들 자체, 그 종류와 부분, [부분의] 수와 [부분 사이의] 차이, [작품 구성의] 예술적 탁월성과 열등성에 대한 판단의 근거들, 그리고 반론들과 해결들에 대한 논의는 이 정도로 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다른 저술에서도 채택한 절차에 따라 ‘본성적으로 더 앞서는 것’에서 ‘우리에게 더 앞서는 것’으로, ‘더 보편적인 것’에서 ‘더 개별적인 것’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형이상학』은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는 인식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일반적 규정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모든 기술과 탐구, 그리고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는 윤리학의 제1원리에서, 그리고 정치학은 “우리는 모든 폴리스가 어떤 종류의 공동체이고, 모든 공동체는 어떤 좋음을 위해 구성된다는 것을 관찰한다”는 공동체적 동물로서 인간의 보편적인 정치적 본성에 대한 기술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시학』은 저술의 목표를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은 일반적 규정에서 시작한다. “서사시와 비극시, 또한 희극[시]과 디튀람보스시 [같은 시 예술들], 그리고 아울로스 및 키타라 연주술 같은 대부분의 [기악] 예술은 모두 모방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와 같은 시 예술에 대한 일반적 규정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시 예술에 대한 보다 개별적인 규정으로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제1장에서 제5장까지는 모든 예술이 공통으로 전제하는 유(類)를 종차(種差)와 결합해 시 예술에 대한 정의를 제시한 이후, 시 예술의 개별적 종류를 특히 그 역사적 생성과 발전의 측면에서 개괄적으로 다룬다. 제6장에서 제22장까지는 시 예술의 대표적 한 종류인 비극을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부분들과 관련해 분석하며, 제23장에서 제26장까지는 비극의 출현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던 서사시를 비극과의 비교 관점에서 고찰한다.
『시학』 해석에 대한 새로운 시각: 유럽 전통 이전인 10세기 아랍 주석가들
끝으로 번역자인 이상인 교수는 『시학』을 번역하고 주석하고 해석하는 유럽 전통의 역사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들보다 이른 시기인 10세기부터 아랍 철학자들 - 알-파라비(al-Farabi), 아비켄나(Avicenna), 아베로에스(Averroes) 등 - 이 『시학』에 주목했음을 ‘해제’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 세 학자의 공통점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이들 모두 『시학』의 주석을 썼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학』을 전 학문체계에 배치하는 것에서 『시학』 해석의 출발점을 찾았다는 것이며, 마지막은 『시학』을 안드로니코스가 ‘오르가논’으로 편집한 논리학적 저술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부연해서 역자는 “그리스 시에 정통하지 못했던 아랍 주석가들의 『시학』 이해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시학』의 학문적 위치를 어떤 식으로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에 따라 규정하려 시도하고 『시학』의 저술 목표가 시적 대상에 대한 인식의 논리학을 구축하는 데 놓여 있다는 점을 통찰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이렇게 본다면 아랍 주석가들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 예술에 대한 탐구를 행위 논리학, 즉 필연성 또는 개연성의 원칙에 따라 다채롭게 펼쳐지는 인간의 ‘삶의 논리학’으로 인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유럽 전통의 시각에서만 『시학』 텍스트를 이해해온 지금까지의 우리에게 신선한 혜안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