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된 감독 평전은 크게 세 가지 미덕을 포함한다. 먼저 평전 대상, 곧 감독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다.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취재와 자료 수집,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저자의 인격을 걸고 벌이는 지적 전투 같은 것이다. 마치 초상화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화가에게 가능한 그림인 것과 같다.
둘째, 개인의 특정한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정치역사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펠리니는 왜 영화 속에 파시스트들을 그렇게 자주 등장시켰을까? 이탈리아 파시즘의 이해 없이 펠리니라는 사람을 알기는 어렵다. 펠리니는 파시즘과 함께 고스란히 성장기를 보냈다. 이를테면 아르놀트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특정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당대의 정치역사를 통찰하듯, 감독 관련 역사적 배경에 대한 풍부한 해석이 있으면, 우리의 이해는 깊어진다.
셋째, 당연하게도 영화에 대한 이해다. 예술가 평전이 어려운 게, 인간적, 정치역사적 식견을 갖춘 필자도 해당 예술까지 이해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예술을 좋아하는 것과 전공 수준의 지식을 갖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의 간격일 것이다.
저자 툴리오 케치치는 이 세 가지 미덕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의 중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영화 전문기자였다. 이 신문은 프랑스의 ‘르몽드’처럼, 사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최고급의 일간지다. 현역일 때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관련 언론인이었다. 기자답게, 펠리니의 출생 관련 서류까지 샅샅이 뒤져, 사실에 가장 가까이 가려고 노력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평가받는 기자들의 깊이 정도는 가졌다고 상상해도 될 것 같다. 특히 카를 융 심리학의 방법론으로 접근하는 ‘달콤한 인생’ 이후의 작품 해석은 그것 자체가 펠리니라는 한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자는 시의성과는 떨어져 살 수 없다. 곧 정치역사에 관해 늘 촉을 세우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대표 기자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정치역사에 대한 탁월한 시각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펠리니는 1920년에 태어나 1993년에 죽는다. 곧 그는 20세기의 인간이다. 저자 케치치는 1차대전, 파시즘, 2차대전, 미국의 등장, 냉전, ‘68혁명’, 1970년대의 테러리즘, 그리고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까지, 개인 펠리니의 삶에 흔적을 남긴 당대의 정치를 한눈에 읽고 있다. 이 책은 20세기 관련 정치사 개론이 되기에도 모자람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에 대한 이해력의 문제인데, 일반적인 기자가 아니라 전문기자였다는 점, 1950년대부터 40년 가까이 현역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감사의 말’에 밝힌 대로, 저자는 영화 관련 주요한 저서를 여러 권 남겼다. 특히 펠리니의 에피소드 형식의 혁신성을 설명하며, 당대 아방가르드 예술가 조직을 이끌던 움베르토 에코의 ‘열린 예술작품’ 개념을 적용한 것은 케치치의 전문성을 확인하게 하는 사례일 것이다.
덧붙여 잘 된 평전은 전공자는 물론 입문자에게도 매력이 있어야 한다. 입문자 대상으로 쓴 책을 읽으면, 쉽지만 독자는 늘 제자리에 머물기 쉽다. 그래서는 미래로 가기 어렵다. 그렇다고 전공자 위주로만 쓴 책은 오히려 공허하고, 지식의 폐쇄성 속에 안주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는 상상력에 호기심을 자극하기 어렵다. 이 책은 영화 입문자가 읽기에도 충분한 설명과 풍부한 해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전공자들은 알 것인데, 펠리니 관련 평전 가운데, 모든 언어를 통틀어,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헌이 바로 이 책이다. 영국의 영화학자 피터 코위는 펠리니 관련 감독론 가운데 이 책이 최고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책은 영어, 불어, 독어, 스페인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