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의 삶과 그림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흔히 그의 거처를 기준으로 덕소/수안보/용인 시절로 구분되어왔다. 그러나 장소의 변화보다는 오히려 심상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자전적이며 이상적인 성격의 작품들은 삶을 바탕으로 한 주제와 조형적 독자성이 그 근간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저자는 새로운 시기 구분을 제시한다. 장욱진의 작품세계를 ‘자전적 향토세계’, ‘자전적 이상세계’, ‘종합적 이상세계’의 3단계로 구분해서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조형방법과 세계관이라는 형식과 내용상의 변화를 새롭게 포착할 수 있게 된다.
작은 그림, 큰 주제
장욱진의 그림은 작다. 그림은 프레임으로 잘라낸 제한된 공간 안에 화가가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인데, 장욱진의 그림은 이러한 물리적 조건이 최소화되어 있다. 그러나 프레임의 공간은 화가의 상상력에 따라 거대한 우주가 될 수도 있다. 화가가 의도한 공간의 구조와 내용에 따라 이미지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확대되고 재생산된다. 따라서 그림은 규모만으로 그 가치의 질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장욱진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장욱진의 그림들은 엽서만 한 작은 크기지만, 물리적인 프레임과 스케일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장욱진의 자화상들
장욱진의 작품에는 한정된 소재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나무, 집, 가족, 까치, 해와 달, 산과 아이 등이 대표적이다. 자전적 성격의 작품을 많이 남긴 화가인 만큼 이런 소재들은 그의 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비록 자신을 닮은 인물이 아니더라도 이들은 화가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소재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익숙한, 보편적인 것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화가의 개성은 공동언어와 같은 보편성을 통해 표현된 셈이다. 이처럼 독창성을 추구하는 장욱진은 서구 모더니즘에 뿌리를 두면서도 전통의 질서 위에서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에게는 한국적인 것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것이 한국적이다.
먹그림
장욱진의 유화작품들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많다. 그의 작품은 우리 화단의 일반적인 장르 개념 바깥에 있다. 장욱진은 오히려 동/서의 강박관념을 없애고, 우리의 전통을 현대에 접목할 수 있는 조형적 가능성을 회화로 구현한 작가에 가깝다. 미술사적 맥락에서 그의 작품은 원시미술이나 민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먹그림과 불도로서 그린 그림들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장욱진의 먹그림은 미완의 습작이나 밑그림 정도가 아니라, 화가 고유의 조형 세계가 이룩한 성과로 우리의 현대미술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불교와 모더니즘 너머
장욱진의 작품 중에서 불교와 직접 관련된 것들은 지극히 적다. 그리고 그는 불교미술의 관점으로 불화를 그리거나 불교적 신념을 주제로 삼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장욱진의 작품세계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은 작지 않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불교와 연이 깊었고,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는 것’이란 신념은 불교의 세계관과 분명 닿아있다. 비록 그의 작품들에서 노장사상의 흔적이 엿보이긴 하나, 불교는 화가로서의 장욱진의 태도와 예술 개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서 생략과 압축의 미적 형식은 단순히 모더니즘의 영향에 국한되지 않고, 예술을 도구 삼아 ‘참된 나’를 찾는 과정의 일환이다.
장욱진의 자리
장욱진은 어떤 의도를 전제한 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스스로 밝히길, 그리는 행위에 집중하고 반복해서 몸을 움직일 때 문득 그림과 내가 구분되지 않는 일체의 순간이 찾아온다고 했다. 이 지점에서 장욱진의 그림은 미학적 모더니즘의 한계를 벗어난다. 순간의 무의식적인 행위들과 그 순간의 ‘지금들’이 현재진행형으로 모여들어 저절로 그림이 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형식들은 이러한 시간들의 흔적이다. 자연이 공간의 일이라면 그림은 시간의 일이다. 장욱진의 작은 그림은 단순하게 반복되면서도 일정한 조화를 변주하는 새로운 시간을 따라 우리 앞에 큰 세계를 펼쳐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