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연대기적 시간 너머에 위치하는
시적 몽타주의 비평적 힘
9만 미터의 뉴스릴을 앞에 두고 파솔리니는 이 이미지들이 보기를 거부했던 바 혹은 보여주기를 거부했던 바를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겉으로는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증스러운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이미지들을 어떻게 다시 몽타주할 것인가. “전쟁 직후 그리고 전후 세계에 당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상성이다. […] 인간은 정상성 속에서 잠이 든다”라는 강렬한 목소리로 시작되는 영화는, 어떤 위험의 징후도 없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기만적인 세계가 당도했음을 알린다. 파솔리니는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과 ‘새로운 자본주의의 국제질서’, ‘자연재해’와 ‘미인대회’, ‘넝마를 거친 하층민들’과 ‘우아한 옷을 입은 부르주아들’, ‘이름 없는 이들의 침묵’과 ‘힘 있는 자들의 연설’, ‘광산 사고 현장에서 촬영된 비탄의 광경’과 ‘그 무렵 세상을 떠난 할리우드 배우 매릴린 먼로의 얼굴과 신체’, ‘추상회화 작품’과 ‘텔레비전 장면’과 같이 이접하는 요소들을 변증법적으로 충돌시키고 재조립하는데, 몽타주의 작용은 관찰자적인 ‘초연함’과 입장을 취하는 ‘분노’라는 이중적인 시선 사이에서 특유의 시각적 운율을 만들어낸다.
또한 영화는 세 개의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번째는 이미지를 해설하는 ‘공식적인 목소리’ 즉 권력의 목소리, 두번째는 ‘산문의 목소리’ 즉 정치적인 양심의 목소리, 세번째는 ‘시의 목소리’이다. 파솔리니는 두번째 목소리의 낭독을 반파시스트 화가이자 친구인 레나토 구투소에게 맡겼고, 세번째 목소리는 『핀치콘티가의 정원』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이자 친구인 조르조 바사니에게 맡겼는데, 이 두 목소리는 마치 정치적이고 시적인 두 면모가 음색과 리듬의 대조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듯이 대조를 이룬다. 디디-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이 시각적 시가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이질적인 시간 속에서 불러냄으로써 합의된 이미지가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 안에서 돌연히 출몰하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고 읽게 만드는 비평적 힘을 갖는다고 이야기한다. 파솔리니는 이렇듯 아무런 ‘위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시대에 ‘광산 가스’와 같이 우리를 위협하는 ‘잠재적 위기’를 감지해낸다.
이 책은 역사가와 예술가들에게 제대로 보이지 않는 파국, 혹은 공식적으로 인지된 파국의 형상 아래 모습을 감추고 있는 또 다른 파국들을 감지해내고 경고를 줄 수 있는 사유 혹은 창작의 방법론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벤야민과 아비 바르부르크, 크라카우어, 브레히트, 아도르노, 아감벤 등의 논의를 참조하여 변증법적 이미지의 작동방식이라 할 시각적 몽타주와 그 사유 형식을 분석하는 이 에세이를, 디디-위베르만은 그가 주창하는 몽타주적인 형식 속에 분석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