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국가이성을 위하여
『국가이성론』에서 보테로는 마키아벨리의 국가이성을 비판하면서도 국가이성이라는 개념 자체는 그대로 가져와 ‘선한’ 국가이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책의 서두에서 국가이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국가란 인민에 대해 확고한 지배권을 가진 영지이며, 국가이성이란 그러한 영지를 창건하고 보존하며 확장하는 데 적합한 수단에 대한 지식이다.”
- 『국가이성론』 1권 1장 중
보테로는 정치의 목적을 국가의 보존과 그리스도교 옹호에 두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지향하는 국가이성만이 진정한 것이며, 국가의 이익만을 추구할 뿐인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사악하고 부도덕하다고 간주했다. 이와 함께 보테로는 『국가이성론』에서 근대적인 영역 국가가 처한 새로운 문제인 조세, 관료 제도, 통상, 산업, 법 집행, 식량 공급, 도시 계획 등을 체계적으로 고찰했다. 그는 특히 세금 문제를 중시했는데, 상품에 대한 간접세보다는 수입에 대한 직접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무역과 상업을 다방면으로 원조함으로써 국부를 증대할 수 있다는 중상주의적 면모를 보였다. 이렇듯 국가를 경영하는 행정의 기술에 방점을 둔 보테로의 논의는, 르네상스 소국의 참주를 위한 권력의 기술에 초점을 둔 마키아벨리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 때문에 보테로는 오늘날 중상주의와 행정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한편 보테로는 국가의 보존을 위해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교활성’보다는 ‘분별’을, ‘유용성’보다는 ‘명예’를 우선할 것을 제시했는데, 이는 “위대한 일을 이룬 군주들은 신의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고, 교활함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어떻게 혼란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라고 한 마키아벨리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군주는 교활성이 아니라 분별을 천명해야만 한다. 분별이란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합한 수단을 탐색하고 찾아내는 기능을 가진 하나의 덕성이다. 교활성은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나 분별과는 다음의 점에서 구별된다. 즉 수단의 선택에서 전자가 이익 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는 데 반해, 후자는 유용성보다는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다.”
- 『국가이성론』 2권 8장 중
마키아벨리의 방법으로 마키아벨리를 공격하다
그러나 보테로가 군주를 위해 제시한 실제적 조언은 종종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적 행위 윤리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보테로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군주들이 오직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였다. 나중에 간행한 『국가이성론 중보』에서는 국가이성이란 거의 ‘이익의 원리’와 다를 바 없다고까지 단언했다.
“군주의 결정에는 이익이 다른 모든 것을 앞선다는 점을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군주를 대하는 사람은 이익에 기초하지 않는 한 어떠한 우정도 혈연도 조약도 혹은 다른 어떤 유대도 믿어서는 안 된다. 폴리비오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이 친구가 되고 적이 되는 것은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이익에 의해 친구인지 적인지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 『국가이성론』 2권 6장 중
그런가 하면 통치는 엄격한 것이 다정한 것보다 낫다고 했고, 군주는 어떤 부류의 사람과도 교제하거나 친해져서는 안 되고 감정을 억제하여 정치적 의도를 은폐하거나 위장해야 하며, 자신의 약점을 교묘히 숨길 것을 권고하는가 하면, 이익이 될 때만 신의를 지킬 뿐이라며 마키아벨리적인 관점을 보여 준다. 이러한 공리적 관점은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즉 그가 누누이 종교를 옹호한 데는 신앙의 측면보다도 군주에게 현실적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바가 있으며, 국가의 경제적 번영에도 유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보테로는 표면적으로는 종교와 도덕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마키아벨리와 다르지 않은 모순을 보여 주었는데, 그러나 그 자신은 이를 모순으로 느끼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종교와 정치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한 국가이성을 강조하면서도 마키아벨리적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보테로의 사상은 그만큼 절대군주정이라는 형태로 표출된 근대국가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전통적 봉건사회에서 근대국가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잘 엿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