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나 부모의 필요가 아니라,
청소년 자신의 절실함으로 기독교를 붙들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누가 강요하면 싫어지기 마련이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교회의 진리가 아무리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심지어 사람을 살릴지라도, 강요하기 시작하면 그 빛은 쉽게 퇴색한다. 그래서 복음 전도가 참 어렵고, 청소년 같은 다음 세대는 더 첩첩산중이다. 일단 싫다고 고개부터 젓는 세대에게 강요나 계몽은 너무나 무딘 창이다. 남은 길은 단 하나, 스스로 찾게 하는 수밖에 없다.
# 이해할 수 있는 이정표
강요하고 가르치는 사람, 소위 ‘꼰대’는 듣는 사람의 상황이나 처지를 잘 모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타자의 언어로 소통하지 못하는 약점을 보인다. 계속 자기 말만 늘어놓는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셨는지 모른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 시대 그곳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야 하니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다. 심기지도 않을 말을 주구장창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푸른바람이 너와 함께해》도 같은 방법을 선택한다. 책이 청소년에게 말을 걸기로 한 이상, 피할 수 없는 결정이다.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의 제목인 “패치”와 “길드”는 온라인 게임 이용자에게는 익숙한 용어다. 이 책은 거기서 출발한다. 전작인 《푸른바람이 너를 기다려》가 청소년에게 익숙한 용어와 표현을 부분적으로 사용했다면, 이번에는 책의 뼈대 자체를 그들(만)의 용어를 빌려서 세웠다. 더욱 과감한 접근이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해서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 매력적인 목적지
그 목적지는 “혼자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책의 부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패하면 안 되는 나라에서 실패해도 괜찮은 나라로 넘어온 청소년들에게 푸른바람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를 밝힌다. 그런데 그 목적지가 지금 이곳의 청소년에게 와닿지 않는다면, 앞서 매우 과감하게 선택했던 접근이 무색해진다. 패치나 길드같이 익숙하고 근사한 이정표를 따라서 왔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알맹이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셈이다. 《푸른바람이 너와 함께해》의 승부수는 이 지점이다. 요즘은 청소년들조차 ‘나만 아니면 된다’라는 상황에 너무 익숙하다. 그만큼 각자도생이 일상이고, 풀 수 없는 족쇄에 가깝다. 그 너머를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혼자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도대체 어떻게? 이 질문은 두 번째 이야기 길드 편의 병아리 공동체 비유에서 꽤나 능숙하게 풀린다.
# 따라 할 수 있다는 증거
이정표에 적힌 글자가 이해하기 쉽고, 가리키는 목적지마저 매력적이라면,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이제 남은 숙제는 저자의 말처럼 “조리법을 알아도 끓여 먹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다”라는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패치”와 “두 번째 이야기: 길드”가 ‘설명’에 가깝다면, 세 번째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실전”이다. 청소년들이 여태까지 들었던 설명을 직접 실행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책의 특성상 이 지점까지 나아가지 못하면, 여기서 실패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여기서 저자는 내밀한 자기 경험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공개한다. 책에서 계속 강조했던 ‘공동체 안에서 보고 배우기’를 지면 위에서 직접 실천한다. 이런 태도는 “실전”이라는 제목과 무척 어울린다. 자신의 글이 공허해지지 않도록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다.
이렇게까지 밀어붙이고 책은 마지막 말을 전한다. “한겨울에도 꽃을 피우시는 분이 바로 네 아버지시다.” 믿음의 후배들에게 전하는 절절한 메시지만큼 후배 청소년들이 반응하면 좋겠으나 그 점은 여전히 미지수다. 분명한 것은 저자가 책 첫머리에서 강조하듯이 입장을 확실히 정한 청소년만이 《푸른바람이 너와 함께해》의 미덕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만약 이 지점이 명쾌하지 않다면 《푸른바람이 너를 기다려》로 돌아가서 이 길을 갈지 말지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편이 낫다. 이 책의 주장처럼 “인생은 장난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