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출판
1907년 사라 베르나르가 회고록을 파리에서 출판했을 때 연극배우로서 그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이 회고록은 사실 1898년에 쓰여진 것이다. 그녀의 유년 시절부터 사십대 중반의 나이로 1881년 첫 미국 여행을 마치고 프랑스의 르아브르 항구로 돌아오면서 끝난다. 원래 그녀는 회고록으로 두 권으로 생각했다. 물론 두 번째 권은 쓰여지지 않았다. 이 책을 출판하고도 그녀는 42년을 더 살았다.
사라 베르나르가 회고록을 쓴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신문 같은 왜곡된 매체가 아닌 자신이 직접 대중을 향해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고록에는 그동안 자신에게 너무했다고 생각한 신문기사나 공연평을 재수록하고 조목조목 반박한다.
회고록은 전체적으로 매우 생동감 있게 쓰여져 있는데 보불 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에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놓고, 100년 후에도 명성을 유지할 사람들과 자신을 연결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특히 작가 빅토르 위고와의 관계를 강조했는데, 그의 진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빅토르 위고가 그녀의 연극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고 이 눈물 모양의 다이아몬드를 사라 베르나르에게 선물했기에 가능했다.
연극배우로서 사라 베르나르는 전무후무한 인기를 누렸는데 한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군림했다. 사회적 존재로서 그녀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에밀 졸라를 지지했고, 페미니스트이자 무정부주의자인 루이즈 미셸을 변호했으며 사형제도에 맞서 싸웠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믿는 가치를 실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알폰스 무하와의 인연
성 스테판의 날(12월 26일)에 무하는 르메르시에 인쇄소에서 친구의 일을 돕고 있었다. 그때 사라 베르나르의 지스몬다 포스터를 제작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르메르시에의 직원들은 크리스마스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무하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포스터는 1895년 1월 1일 아침 파리 전역에 게시되었다. 길고 좁은 모양, 은은한 파스텔 색상, 실물 크기에 가까운 인물의 고요함은 위엄과 절제의 느낌을 주었다. 포스터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는 알폰스 무하가 도맡아 작업했다.
사라 베르나르에 대한 찬사
“여성 연기자에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나쁜 여배우, 좋은 여배우, 더 좋은 여배우, 위대한 여배우 그리고 사라 베르나르가 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
“가장 존경했던 세 여성은 사라 베르나르, 릴리 랭트리, 빅토리아 여왕이다.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기꺼이 결혼했을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사라 베르나르는 이상적인 삶의 비전이다. 그녀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오, 야생 동물, 아름다운 표범의 매혹과 분노에 찬 가젤, 상처를 입은 채 흐느끼는 사슴처럼 한숨을 쉬는 그녀를 보고 듣는 것은… 사라 베르나르의 연기에는 이 모든 것들이 녹아들어가 있다...” 디.에이치 로렌스(D.H Lawrence)
사라 베르나라의 장례식 필름
https://www.youtube.com/watch?v=0gI4V7jqGv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