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장르가 되다
만화가 하위문화 혹은 불량이란 딱지가 붙어있던 1960년대, 만화 애독자들은 존재를 당당히 드러낼 수 없었다. 그 자신도 하급 아니면 불량 딱지를 받게 되므로…. 그 후 명랑만화, 순정만화 등으로 불리며 불량이란 딱지가 떨어졌지만 숨어서 보는 건 매한가지. “공부 안 하고 시간 낭비한다”는 타박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즉, 만화를 보는 건 독서(공부)가 아닌 그저 헛짓거리일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만화가에게도 독자에게도 불행한 시절이었다. 요즘 웹툰이 드라마나 영화로 각색되어 한류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둘째 치고, ‘독고탁’ ‘오혜성(까치)’ ‘둘리’ ‘하니’ 등 우리 만화의 주요 캐릭터들이 대중적 팬덤을 일으켰던 세기말의 상황만 보더라도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시대는 변해 가수 최백호는 “『도전자』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가수가 아니라 판검사가 되었을 것”이라거나,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만화 『도전자』는 내 인생의 책”이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시대적 인식이 바뀐 것은, 또 그 달콤한 열매를 후세대 만화가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앞선 세대들의 노력 덕분이다. 그 선봉에 섰던 사람이 1세대 만화가 박기정이다. 사실 만화에 하급 혹은 불량이란 딱지가 붙은 데는 이유가 있다. 1960년대에 출간된 일부 만화는 창작보다는 일본 만화를 복제한 것들이었으며, 심지어 같은 그림에 내용만 갈아 끼운 후 배포되는 것들도 있었다. 또 조악한 수준의 그림과 스토리들도 만연했었다. 만화출판사들을 이런 상황에 편승해 돈벌이에만 몰두했다.
박기정은 당시의 이런 만화 생태계를 바꾸고 싶었다. 자신만의 독창적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작업에 몰두했고, 만화에 품격을 불어넣기 위해 영화적 연출기법을 도입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캐릭터를 창조해야 한다는 당위로 이어져 제임스 딘이나 일본의 태양족을 닮은 반항아 ‘훈’이를 탄생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만화가협회를 결성해 불량만화 척결이라는 자정 운동을 벌였고, 상황을 상업적으로 이용만하고 있던 출판사에 저항했다. 그 결과 만화가들을 쥐락펴락하며 하급 문화 재생산에 열을 올리던 ‘합동’(만화 전문출판사)이라는 독점 체제를 끝낼 수 있었다.
박기정의 만화에는 일제에 핍박받고 만주에서 이민족으로 떠돌던 우리 민족의 한(恨), 울분, 자긍심, 용서의 정신이 녹아있다. 그가 1960년대 초중반 잇달아 발표한 『가고파』 『은하수』 『들장미』 『흰 구름 검은 구름』 『도전자』 『폭탄아』 등의 비극 작품들은 독자들을 고난과 깊은 슬픔으로부터 끌어내어 환희와 희망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 결과 반항아 훈이는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표상이 되었다. 그 후 그가 확립한 비극적 문법은 우리나라 만화의 클리셰가 되기도 했다.
박기정이 극화로만 유명한 것은 아니다. 데뷔작이 중앙일보 네컷만화 『공수재』인데 그 후 100여 편에 가까운 극화를 창작한 그였지만 1978년에는 중앙일보에 정식으로 입사해 「중앙만평」을 그렸다. 중앙일보의 네컷만화 『왈순아지매』로 유명한 정운경과 함께 중앙일보 시사만화의 쌍두마차기도 했다. 중앙일보 시절의 박기정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은 물론 이웃 나라 정상들의 캐리커처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우정 김마정 이두호 최덕규 박흥용 등은 박기정의 직계 제자이고, 박부성 이상무 등은 범 박기정계다. 그는 자신의 화실에 몰려든 제자들이 작가로서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주기 위해서도 애썼다. 실제로도 대부분 독립해서 일가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