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예술의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원동력은 호기심이다. 그리고 호기심과 관련하여 판도라 상자의 속성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터이다. 판도라 상자의 핵심은 뚜껑이고, 판도라 상자의 뚜껑은 가벼운 것들을 가두는 데 필요한 장치이다. 유감스럽게도 예술가들에게 가장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뚜껑을 열어보는 순간, 휘발되어버리는 이 가벼운 것들이다.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들. 가벼운 것들이 예술가들을 매혹한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는 그렇게 매혹적이면서 가벼워서 우리 일상 속으로 휘발되어버리는 것들로 가득하다.
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 신들이 판도라를 통해서 인간에게 악의적으로 전달한 불행의 선물들은, 그렇게 매혹적이면서 가볍게 처리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판도라가 ‘새것’의 상징이라는 점도 돋보인다. 모든 예술, 그것도 현대의 개념예술에서는 오직 새것만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최초로 아이디어를 발견해서 작품으로 선보였는가가 예술적 가치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뚜껑은 이렇듯 예술가들의 ‘새것 콤플렉스’를 부추긴다.
이 책은 한국시문학사라는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열고 ‘전환기’라는 공통의 주제 아래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와 제3부는 각각 21세기에 들어선 현대시와 1980년대 한국시문학사의 전환기적 성격을 살펴본 글들인데, 특히 3부는 『현대시학』에 「시집으로 살펴보는 현대시문학사」라는 제목으로 필자가 연재했던 글들을 묶은 것이다. 그리고 제2부는 최근 2~3년 동안에 교보문고에서 발간하는 문예지 『대산문화』를 비롯한 몇 군데 잡지에 연재했던 필자의 문단 체험 수기를 정리한 것이다.
1980년대는 필자 자신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것은 이경호 평론가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이었다. 필자의 삶이 걸어가야 할 방향으로 문학을 선택하고 문단에 첫발을 내디딘 시기였기 때문일 터이다. 1988년에 등단한 이후로 필자는 문학평론가로, 때로는 문예지 편집자나 기획자로 수많은 문인들과 문단의 사건들에 접촉해 왔었다. 그것들에 대한 체험기록을 에세이로 풀어낸 제2부의 글들은, 사소하거나 사소하지 않은 징후들을 내장한 우리문학의 원체험이나 참고자료나 문학적 연대기로 간주하여도 무방할 듯하다. 필자의 말을 빌리면, 이 에세이들은 우리문학에서 전기문학이나 문학인에 대한 참고자료의 부피가 넉넉하지 못한 현실을 되돌아보며, 작업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평론집과 산문집을 통합하는 책의 구성 방법을 고민한 결과였고, 한국문단사의 소중한 기록이며, 자산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