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권력을 얻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결혼을 담보로 호족들과 연합했다. 결혼은 난세에 협력과 보답을 약속하는 보증수표와 같았다. 삼한을 통합하고 고려를 건국하고 새 시대를 열기까지 왕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아내를 얻었다. 제1비 신혜왕후는 유천궁의 딸이자, 왕건의 적처(嫡妻)가 되었다. 정주 유씨(柳氏) 가문은 군대를 먹이고 재울 만큼 재력이 풍부해 왕건의 최대 후원자가 되었다. 제2비 장화왕후의 집안은 군사력, 경제력, 신분 등 내세울 게 없었지만, 호족들의 협력을 이끌어내 왕건이 후백제와 결전을 치르게 했다. 제3비 신명순성왕태후는 유긍달의 딸, 제4비 신정왕태후는 패서 호족인 황보제공의 딸이었다. 제5비 신성왕태후는 사촌 누이였고, 제6비 정덕왕후는 또다른 정주 유씨(柳氏) 가문의 딸이었다. 이렇듯 왕건은 결혼동맹과 호족 연합으로 ‘삼한의 사위’ 왕서방이 되었고, 충성스러운 후원자들을 장인으로 삼았다.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동생이자 김춘추의 아내이며 문무왕의 어머니다. 문명왕후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삼국통일에 힘을 모으게 하고, 그 임무를 완성할 문무왕을 낳았다. 김유신은 낭도들과 함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삼국통일이라는 시대정신을 부각했다. 하지만 문명왕후는 삼국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국력을 일으킬 인재들을 모으고 나라에 충성할 세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라 최고의 귀공자였던 김춘추와 결혼한 명성왕후는 얼마 후 법민(문무왕)을 낳는데, 이는 삼국통일의 포부가 빚은 사랑의 결실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명재상과 대장군으로서 신라의 국익을 위해 호흡을 맞추었다. 한 손은 외교술을 펼치고, 한 손은 칼을 휘두르며 일심동체가 되었다. 661년 왕위에 오른 문무왕은 패수(대동강) 이남에서 신라·백제·고구려·가야를 아우르면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오랜 숙원인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사랑보다 잔인한 것은 없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한국사에서 가장 비정하고 서글픈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에게 “그대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순다면 내가 예를 갖춰 맞이하리다. 안 그러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라며 북과 나팔을 못 쓰게 만들라고 시켰다. 북과 나팔은 적병이 오면 저절로 울렸다. 낙랑공주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몰래 무기고에 들어갔다. 북의 가죽과 나팔의 입을 베어버리자 호동왕자는 아버지 대무신왕에게 권해 낙랑국을 급습했다. 낙랑국의 왕 최리는 원통한 나머지 낙랑공주를 죽이고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낙랑공주는 왜 호동왕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자명고각을 망가뜨려 아버지의 손에 죽었을까? 사랑이었을까? 호동왕자도 그해 겨울 자살했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아내에게 못할 짓까지 했건만 돌아온 것은 어머니를 농락했다는 파렴치한 낙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정한 어리석음이 부끄러워 몸부림치다가 스스로 칼에 엎어져 목숨을 끊었다. 어쩌면 호동왕자와 낙락공주의 사랑이 정치의 제물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사도세자는 영조가 맏아들 효장세자(진종)를 잃고 나이 마흔에 다시 얻은 아들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성군의 재목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학문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자 영조의 엄한 책망이 이어졌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야단쳤다. 사도세자의 마음은 알게 모르게 병들어갔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의 닦달과 편벽이 심하다고 여겼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결국 영조는 정성왕후의 혼전(魂殿)에서 세자를 폐하고 뒤주에 가두었다. 폐세자는 한여름에 숨 막히는 뒤주에서 8일간 버티다가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혜경궁 홍씨는 가슴을 치며 슬픔을 삭여야 했다. 영조는 총명하고 효심이 지극한 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올리고 ‘역적 죄인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했다. 남편의 죽음을 묵인하고, 자식을 품에서 놓아준 끝에 혜경궁 홍씨는 이들 부자가 국왕 반열에 올라서는 데 일조했다. 버림의 미학이요, 애틋한 모정이다.
사랑만 한 슬픔이 어디 있으랴
원경왕후는 지혜롭고 담대했다. 현명한 조언과 과감한 행동으로 이방원의 입지를 180도 바꿔놓았다. 정도전이 왕자들이 거느린 시위패를 폐지했는데, 이는 정적들의 사병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사실상 무장해제를 당한 것이다. 그 긴박한 순간에 원경왕후는 병장기를 빼돌려 숨겨놓았다. 또한 정도전이 왕자들을 척살하려는 계획을 입수해 대책을 의논하기도 했다. 결국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또한 이방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을 설득해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난을 진압하게 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조선을 안정시키려면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방원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피를 가장 많이 본 것은 왕비의 혈육, 외척이었다. 특히 원경왕후의 남동생 4형제가 매형에게 목숨을 잃었고, 맏아들 양녕대군도 폐세자가 되었다. 결국 원경왕후와 민씨 일족은 이방원이 왕좌를 차지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나 잔인하게 척결되었다.
“대단히 미안하나 이 유언서를 본적지에 부쳐주시오.”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일본 시모노세키항을 출발해 현해탄을 건너 부산으로 향하는 부관연락선 도쿠주마루 3호실 선객이 남겨놓은 메모였다. 배를 멈추고 안팎을 수색했으나 선객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바다에 몸을 던진 것 같은데 몇 시에, 어느 지점에서 그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남자는 목포 대부호 김성규의 맏아들이며 극작가·연극평론가로 알려진 김우진이었고, 여자는 평양 출신으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나온 조선 최고의 소프라노 윤심덕이었다. 김우진은 유부남이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정사 사건은 곧 세상에 알려졌다. 부관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사랑 때문에 자살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예술적 동반자로서 신뢰와 정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비아냥댔다. 그러나 윤심덕과 김우진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 것은 예술적 동병상련이었다. 윤심덕은 유서를 남기는 심정으로 〈사의 찬미〉를 불렀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