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뉴스를 보다 보면,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만이 귓가에 들려옵니다. ‘말세’라느니 ‘세상이 흉흉’하다느니 하는 소리는 고릿적부터 들어왔건만, 그 얘기가 어느새 무겁게, 피부에 와닿는 시절인 듯합니다. 누군가의 죽음조차 누군가에게는 조롱거리가 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윤리보다는 이익을,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타인보다는 자신만을 중시합니다. “하필 왜 이익을 말”하느냐는 철 지난 사상가의 물음도, “이익을 보면 의로운지 생각”하라는 그 철 지난 사상에서 유래한 한 영웅의 유묵도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처럼 윤리가 무너진 오늘에 칸트의 윤리학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칸트일까요? 윤리를 논한 게 칸트 하나도 아니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현대의 철학자도 있는 마당에 왜 하필 칸트의 윤리학을 요청하는 걸까요? 이 책의 저자는 칸트의 윤리학이 우리 전통 윤리와 유사하기에, 우리가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 전통 윤리라고 함은, 흔히들 탈레반이라는 말과 함께 일컫는 유교입니다. 그런데 칸트의 윤리학이 유교와 유사하다니, 이게 과연 정말일까요? 얼핏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인 듯하지만 사실 칸트의 윤리학과 유교 도덕은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러한 유사성은 두 윤리의 원전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기본적인 원칙부터가 그렇습니다. 모두 잘 알다시피 칸트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유교에서는 이를 조금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마라.” 우리는 흔히 우리에게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댑니다. 마치 우리는 조금 도덕을 어겨도 좋고 다른 사람은 그래선 안 된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지 않으면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내가 지키려 하지 않으면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런 도덕법칙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도덕법칙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과 나에게 공평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칸트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덕적인 일에서는 평범한 이성의 판단으로도 충분하다.”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이 멀리 있는가? 아니다. 내가 인하고자 하면 곧 인이 그에 이른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완벽히 도덕적인 사람이란 있을 수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리는 계속해서 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언제나 흔들립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붙잡고 살아갈 만한 기둥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래서 우리는 칸트의 윤리학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원전’, ‘칸트’, ‘윤리학’이라는 세 단어의 조합은 언뜻 보기에 상당히 어려운 내용을 품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겨 냅니다. 이 책은 그렇게 어려울 것만 같은 ‘원전’에 담긴 ‘칸트’의 ‘윤리학’을 제대로,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 노고의 결과입니다. 저자는 서울대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칸트의 윤리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고, 그 방법이 바로 원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 강의와 함께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첫발을 내딛는 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디뎌야 합니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