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통일의 선구자
김구의 어릴 적 이름은 창암이었습니다. 창암은 어려서부터 고집불통이었고, 개구쟁이였습니다. 양반이 되려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17살에 과거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후로 부정 부패한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병서를 읽으며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뒤 창암은 동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름을 창수로 바꾸어 교도들과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많은 인재를 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 당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노에 찬 창수은 주막에서 우연히 칼을 차고 있는 일본인을 만나게 되고, 너무 화가 나 그를 죽이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 몰래 탈옥을 하여 이름을 다시 김구로 바꾸고 절에 숨어 지냈습니다.
김구가 35살이 되었을 때, 김구는 신민회 회의에 참석해 만주에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격무 국장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김구는 한인 애국단을 만듭니다. 1년 뒤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일본에 맞서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는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를 옮기고,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한대 묶어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김구는 임시 정부의 군대로 한국광복군을 만들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그토록 원하던 광복을 맞게 됩니다. 그 뒤 임시 정부 요인들과 귀국한 뒤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만들어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평양으로 가 분단을 막고 통일을 이루려 했지만, 그토록 기대했던 남북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남한과 북한에는 각기 다른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김구는 조국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49년 74살에 안두희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