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주는 다른 층위의 평안을 말하다
글릭의 시를 읽는 일은, 수많은 크고 작은 존재들은 목소리를 다시 읽는 일이다. 첫 시집, 《맏이》와 두 번째 시집 《습지 위의 집》이 사랑과 혼인, 출산 등을 둘러싸고 젊은 글릭의 영혼에 새겨진 아픔과 기쁨을 주로 이야기했다면, 이 세 번째 시집부터는 신화의 세계의 현실적 변주가 더욱 두드러진다.
시인은 죽음이 사람들에게 충격, 절망, 슬픔, 그리고 그 너머의 어떤 감정적ㆍ체험적 움직임을 준다고 생각했다. 울부짖고 눈물흘리는 슬픔 이상의 어떤 것을 죽음을 통해 체험하게 된다고 생각한 시인은 이 시집에 죽음에 대한 사유와 고찰을 가득 담았다. 글릭은 세계를 수학으로 풀어 읽는 철학자처럼 자신만의 언어로 세계를 바라보고 읽어낸다.
글릭이 읽고 시로 풀어쓴 수많은 이야기에는 생명 가진 존재들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 그 죽음을 끌어안고 우는 이들도 있고, 그 죽음을 품는 자연도 있다. 죽음에서 시작되어 다시 죽음을 맞는 생명 가진 존재의 필연적인 행로를 각 시에 담아냈다. 시인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죽음은 다른 층위의 평안을 준다는 자연의 섭리를 이 세 번째 시집에 담아냈다.
21세기 노벨문학상 첫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
2020년 루이즈 글릭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시문단에서는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2000년 이후 여성 시인으로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1909년에 〈닐스의 모험〉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최초 여성 작가 셀마 라겔뢰프 이후 16번째이고, 1996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이후 두 번째 여성 시인이다. 한림원 위원인 작가 안데르스 올손은 “《야생 붓꽃》(1993)에서 《신실하고 고결한 밤》(2014)에 이르기까지 글릭의 시집 열두 권은 명료함을 위한 노력이라고 특징지어진다”고 했다. 덧붙여 글릭의 작품 세계를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비교하며 “단순한 신앙 교리(tenets of faith)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엄정함과 저항”이라고도 표현했다.
루이즈 글릭은 50년 동안 미국 시 문단 중심에 선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그래요, 기쁨에 모험을 걸어보자고요 / 새로운 세상의 맵찬 바람 속에서”라는 구절이 있는 시 〈눈풀꽃〉만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는 현대 문단을 대표하는 서정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퓰리처상 · 전미도서상 · 미국 계관 시인 · 국가인문학메달 · 전미비평가상 · 볼링겐상 · 로스앤젤레스타임스도서상 · 월리스스티븐스상. 그리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그녀의 작품은 우아함, 냉철함, 인간에게 공통적인 감정에 대한 민감성, 서정성, 그리고 그녀의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난 거의 환상에 가까운 통찰력으로 지속적으로 찬사를 받는다. 2023년 10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