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르켕의 사회주의론은 어떤 책인가?
1871년 노동자 봉기로 시작된 파리코뮌(뒤르켕은 이를 소외된 노동자계급의 분노 표출로 보았다.)은 정부군의 잔혹한 탄압으로 70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이후 코뮌을 함락하고 들어선 제3공화정은 2차 대전 때 독일에 의해 파리가 함락되는 1940년까지 지속되었다. 제3공화정은 프랑스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바탕이 된 것으로 평가되나, 제3공화정은 드레퓌스 사건으로 사회가 분열되고, 파나마운하 독직 사건으로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가중되었다. 1882년에 폴 라파르그와 장 조레스를 중심으로 노동당이 탄생하고 조르주 소렐의 생디칼리슴을 바탕으로 한 노동운동이 고조되어 내부적으로 동요되었고, 세계 대전이라는 외부 충격으로 체제 위기에 이르는 등 잠시도 조용한 시기가 없었다.
뒤르켕은 이러한 분열과 혼란으로 점철된 시대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뒤르켕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당시 사회적 영향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학창시절에 만난 장 조레스(Jean Jaurès, 1859~1914)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조레스는 처음에는 공화주의자였으나 나중에 사회주의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뒤르켕은 교육 행정에 관여하면서 사회주의 활동가들도 접했다. 그 중에는 당시 급진 노동운동을 지도하던 쥘 게드(Jules Guesde)도 있었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뒤르켕은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공감했으나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전개되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에 반대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사회주의에 대한 정의에서는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쥘 게드와 장 조레스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선언했다. 그 영향인지 뒤르켕은 당시 급진적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던 프루동(Proudhon)의 저작을 공부하고 1896~97년에 프루동에 관한 강의를 준비했다. 또한 3년 동안 마르크스 및 독일 사회주의와 그전까지 잘 알지 못했던 독일 사회주의운동가 라살(Lassalle)을 연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896년에 뒤르켕은 『사회학연보』(L"Annee Sociologique) 편찬 작업을 맡게 되면서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불완전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뒤르켕이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을 적극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사회에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자살론』과 함께 뒤르켕의 대표작 중 하나인 1893년에 발간한 『사회분업론』에서 ‘집산주의’(collectivism)를 제시하여 당시 지배적인 학풍을 이루던 도덕주의자들 및 고전파 경제학자들과 충돌을 빚었다. 이로 인해 뒤르켕은 파리대학에서 면직되었다. 뒤르켕 자신은 직접 사회주의 운동과 거리를 두었지만 생시몽이나 마르크스를 통해 사회주의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제자들 중 일부는 마르크스주의 또는 게드주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기도 했다. 뒤르켕이 사회주의 자체에 명백하게 반대하지는 않았음에도 사회주의 운동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것은 당시 전개되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의 폭력성과 계급적 성격 때문이었다.
이 책은 주로 생시몽의 사회주의 사상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푸리에, 오웬과 함께 공상적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그중에서 생시몽은 시기적으로 약간 앞서는 선구자다. 생시몽을 공상적(Utopian) 사회주의자라고 칭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이다. 마르크스(1818~1883)보다 약 60년 일찍 태어난 생시몽(1760~1825)은 절대왕정의 귀족 출신으로 미국 독립전쟁(1775~1776)에 참가했고, 프랑스혁명 때는 자코뱅파에 섰다. 그는 유물론에 찬성하고 관념론에 반대했으며, 사회 발전에도 일정한 법칙이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등 급진적 사상을 피력했다. 그러나 역사의 추진력이 도덕과 종교에 있다는 관념론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해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또한 계급인식이 결여되어 단지 노동자계급의 생활 수준의 개선을 주장하는 데 그쳐 후대로 따지면 개량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뒤르켕이 사회주의에 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생시몽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물론 뒤르켕은 자신이 사회주의는 물론 개량주의 또는 수정주의를 지지한다고 표명한 적은 없다. 구조주의 사회학의 대표자로서 뒤르켕은 자신의 인식론적 입장에 맞게 사회주의를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하나의 사회적 사실(social fact)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뒤르켕에게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 설명하는 문제다. 이 책이 사회주의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시몽 사상은 후대의 바자르(A. Bazard, 1791~1832)와 앙팡탱(B. P. Enfantin, 1796~1864) 등 제자들이 생시몽 학교를 설립하여 지속적으로 강의를 하면서 체계화되었다.
생시몽의 사회주의 사상
19세기에 전개된 지적 흐름을 보면 오귀스탱 티에리의 역사학,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 종교의 부흥에 대한 열망 및 사회주의 운동과 사상 등을 들 수 있다. 산업활동에 기인한 이런 경향들을 생시몽은 산업주의(industrialism)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주의란 “개인에게 경제적 이익 곧 산업적 이익만이 유일하게 유용한 기능이다.”(생시몽)
사회에 경제적 이익만 있다면, 경제생활은 반드시 사회적이고, 이 경우 집단생활은 집단이나 조직의 통제를 받게 된다. 이것이 사회주의경제 원리이다. 여기서 조직은 산업적 이익을 대표하는 곧 업무 관리 능력이 있는 자에게 사회를 지휘하는 권한을 부여해야 하는데, 이들은 사회의 이익을 강요하거나 권위 행사를 할 필요가 없으므로 정부는 억압기능을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사회주의 정치 원리이자 무정부주의 교리다.)
또한 세상에는 산업적 이익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집단적 관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가능한 많은 부를 생산하여 모든 사람이 최대한 많이 갖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사회주의 도덕)
그리고 산업적 이익은 모든 민족들에 동일하고, 국경이 있음에도 자연스럽게 융합되는 경향이 있어서 산업주의는 논리적으로 국제주의로 귀결된다. 또 산업주의에서 인간의 유일한 목적인 세속적 이익은 그 나름의 가치와 존엄성을 가진다. 따라서 신은 바로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내재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생시몽은 범신론을 지지하고 있다.
고전경제학과 사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고전 경제학은 거의 동시에 탄생했을 뿐 아니라 유래한 근원이 유사하다. 이들은 모두 산업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경제적 이익은 곧 사회적 이익이라고 여기며 기본 원리가 일치하고 모두 사해동포주의 경향을 보이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둘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생시몽과 사회주의자들이 경제적 요인은 공동생활의 본질이므로 사회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반면, 고전경제학자들은 경제적 요인을 집단이 통제하는 것을 거부하고, 사회는 저절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모든 것이 경제적이라면 경제 영역이 사회적인 것을 포함해야 하고, 사회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 다르다. 결국 개인의 이익을 합한 것이 사회적 이익이라는 주장은 모순이다.
또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도 구별된다. 생시몽은 공산주의는 고대로부터 간간이 제기되었으나 사회주의는 19세기 산업혁명 후 산업주의에 기초한 사상이기 때문에 둘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곧 사회주의의 기본 공리가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있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강화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공산주의는 경제적 이익은 반사회적인 경향이 있으므로 종교, 전쟁, 도덕, 미술 등 여타 사회적 활동의 여지를 남겨두되 가능한 한 필수적인 생활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삶이 풍요로워지면 욕망과 욕구를 자극하여 인간이 도덕적 위험에 빠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는 금욕주의적인 도덕을 선호한다.
야하튼 생시몽과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시하고 산업을 가능한 최대의 생산을 확보하도록 조직하고 최상층부터 최하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생산물을 가능한 많이 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지금까지 산업을 지배해온 권력은 쇠퇴하고, 사회는 어떤 세력에도 종속되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결국 산업 자체가 목적이 되고 그 자체에서 규칙을 이끌어낼 것으로 보았다.
욕구를 멈추게 하는 도덕적 힘
그렇지만 인간의 경제적 욕구는 끝이 없다. 동물은 본질적으로 본능적이기 때문에 욕구가 제한되는데, 동물의 생활은 일정한 자극의 충동이 끝나면 본능적으로 멈추게 된다. 곧 생명체가 동화할 수 있는 능력은 한도가 있고, 이런 한도에 상응하여 욕구가 제한된다. 그러므로 모든 유기체는 이런 제한이 각인되어 그 행동이 통제되므로 동물의 욕구 과잉이 드문 이유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욕구의 한계를 설정할 수 없으며 외부에 있는 힘으로 억제해야 한다. 생시몽은 사회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욕구를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서 만족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두 방법은 서로 모순되며 결국 욕구는 제약을 가하지 않으면 진정되지 않는다. 곧 사회질서를 안정시키려면 대중이 자신의 몫에 만족하도록 해주는 권위 있는 존재 곧 도덕적 힘이 필요하다.
그러면 지금까지 무엇이 이런 역할을 해 왔을까? 그것은 집단공동체다. 집단공동체는 (폭력이 아니라) 도덕적 우월성을 통해서 권위를 확보하고 사회의 도덕적 규제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이 점에서 종교적 신조에 호소하는 생시몽의 산업주의 해결책은 다소 적절하게 인식하지 못한 셈이다. 곧 생시몽은 순수한 경제 질서를 제한하려 그 위에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상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려면 도덕이 산업적 이익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생시몽은 도덕에 종교적 성격을 부여했는데, 이는 산업주의 원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어떻게 도덕적 권위를 확립하여 사회 규율을 유지할 수 있는가? 생시몽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조건에 잘 들어맞는 제도는 바로 전문직집단 또는 주식회사다. 전문직집단은 산업적이고 또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기 때문에 산업을 억누르지 않으며 산업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리와 의무를 전문적집단에게 이전하여 국가가 관리하기 힘든 사무, 산업, 예술 등을 관리하도록(확실한 사회 기관이 되도록) 하면 전문직집단이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규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뒤르켕의 노트가 어떻게 『사회주의론』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는가
이 책 『사회주의론』(Le Socialisme)은 뒤르켕이 1895년 11월부터 1896년 5월까지 보르도대학에서 〈사회주의의 역사〉라는 강의를 하기 위해 노트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토대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사회주의론』은 원래 『사회주의와 생시몽』(Socialism and Saint-Simon)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출간한 것을 Collier Books가 The Antioch Press와 함께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뒤르켕의 원본 원고는 그야말로 강의용 노트 형식이어서 많은 점에서 불완전하고 때로는 읽기조차 힘든 부분도 있었다. 그 원고를 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뒤르켕의 조카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가 정리하여 책으로 발간했다. 마르셀 모스는 『자살론』을 비롯해 뒤르켕의 많은 저작들의 준비 작업을 도왔으며 뒤르켕이 『사회학연보』를 편집할 때 조수 노릇을 했다.
생시몽 학파의 사회주의 사상과 그 영향
19세기는 오귀스탱 티에리의 역사학 방법,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 사회주의 이론, 종교 쇄신의 열망 등 다양한 지적 운동이 싹트고 있었는데, 이런 당대의 정신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 생시몽이었다. 올린드 로드리게스, 법학자 뒤베리에(Duveyrier), 바자르(Bazard)와 앙팡탱 등 생시몽의 제자들은 주간지 『생산자』(Producteur)를 창간하고 추종자들을 모으는 등 생시몽 사상은 당시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불안해하며 미래에 희망을 건 교양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바자르 등 생시몽 학파의 사회주의(산업주의)
생시몽이 ‘모든 우주 법칙은 중력 법칙의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듯 바자르는 “세계는 하나다. 모든 사물은 질서와 조화를 이룰 때 정상 상태다. 부조화와 갈등은 자연에 반한다”라고 주장했다. 사실 무기물질을 탄생시키는 분자의 인력, 유기체를 탄생시키는 세포의 인력, 사회를 탄생시키는 사회적 인력은 중력 법칙이 표현하는 천체의 인력과 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인류는 초기 단계에서 전쟁으로 일관된 많은 적대적 집단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다 가족은 도시로, 도시는 국가로, 국가는 연맹체로 조금씩 통합되어 갔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거대 가톨릭 동맹’의 형성되고 동일한 신앙의 권위 아래 결집하여 질서, 통합, 화합의 원리가 깊게 뿌리 내렸다. 인류 역사 초기에는 무력이 모든 사회조직의 기초가 되었으나 전쟁보다는 산업이 더 생산적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점차 무력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모든 민족의 역사에 최대한도로 조화로운 질서와 평화를 이룬 순간을 바자르는 유기적 시기(the organic periods)라 부른다. 이 시기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교리가 확립되고, 정신이 통일된 시기로 기독교사회 역사에서 유기적 시기는 11세기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인 16세기경까지이다.
반면 질서와 조화가 약화되어 유기적 시기가 중단된 위기의 시기(the critical periods)가 있다. 통일된 이념이 흔들리고 개인은 서로 다투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 위기의 시기를 벗어나려면 구제도의 잔재를 개혁하고 공통적인 관념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런 개혁을 위해서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사회적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그 특권을 유지시키는 상속제 폐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바자르는 반대로 자본의 우위가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자본의 우위에 대한 급격한 억제 요구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국가가 생산의 기초를 구성하고 있으므로 결론적으로 축적된 부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 국가가 물려받아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자르가 보기에 산업 노동이 최고도에 달하려면 생산도구는 각 산업 부문 및 지역에 골고루 할당되고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소비 욕구를 정확하게 충족하고 공급 부족과 과잉을 최소화하도록 조직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공급 부족과 과잉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일은 자본가와 소유자 몫이지만, 고립된 개인은 이를 할 적절한 능력이 없으며 또한 자본가도 독단적으로 처리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 도구를 배분하는 일은 개인이 아닌 사회 기관이 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 기관은 각 지부를 통해 모든 유형의 산업과 접촉하며 산업의 모든 부분을 관장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 기관으로 생시몽과 바자르는 은행의 역할에 주목했다. 실제로 은행은 생산도구를 필요로 하는 노동자와 생산도구 소유자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며, 자본가와 소유자를 대신해서 생산수단을 생산자에게 분배하는 일을 담당하고, 개별 개인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또 다양한 산업의 요구사항을 잘 이해하고 광범위한 경제적 영역을 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적 기관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기능을 충분히 작동하게 하려면 모든 은행을 관리하고 통괄하는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모든 생산 자금을 관리하는 권한을 부여하되 각종 기능을 하위 은행들로 이양한다. 이 은행의 관할 아래 특수 산업 분야의 자금을 관리하는 2차 은행들을 설립하고 이 2차 은행을 통해 중앙은행은 산업의 요구사항과 생산력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자본을 다양한 범주의 사업에 어떻게 배분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와 같이 생산수단을 중앙집중화하여 분배하고 여러 은행들을 통합한 시스템을 구축하여 생산수단을 그 은행들의 서비스에 맞춰 관리자에게 맡기는 것이 바로 바자르가 구상한 체계의 근간이다. 이는 “각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분배한다”는 생시몽의 금언은 마르크스가 예고한 공식과 마주하게 된다.
*참고: 그런데 바자르는 현 질서를 비판할 때도 재편성 계획을 세울 때도 대공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푸리에도 역시 대공업 개념에 대한 입장은 명확하지 않다. 실제로 생시몽이 요구한 유일하고 진지한 경제 개혁은 토지 소유권에 관한 것이었는데, 사회주의 태동기에 대공업은 사회주의와 병행적으로 발달했으며 적어도 사회주의는 대공업보다 먼저 확립되었던 것이다.
바자르의 사회체계와 제도 개혁
바자르는 현대 사회가 위기의 시기에 도달했을 때, 특권을 보장해주는 상속권을 폐지하고 재산제도를 개혁하여 생산도구는 개인이 아닌 사회 기관에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 입법, 법원에 관련된 개혁도 제안했다.
그런데 이 사회 기관들은 공동의 신념체계의 지원을 받을 때만 권위를 가지므로 그 이념을 구현하고 다른 모든 이념을 지배하는 고유의 제도를 최종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사회제도는 신념체계가 있어야 제도확립이 되며 그 신념은 종교적 성격을 띤다. 바자르가 보기에, 인류는 새로운 교리 확립을 통해서 새로운 종교가 구 종교를 대체할 때만 혼란이 종식되고 사회적 힘이 결집하여 다시 조화롭게 되었다. 달리 말해, 종교는 민족 또는 인류 특유의 집단적 사고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집단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종교적 성격을 띤다.
또한 그는 종교의 발달과정을 물신숭배, 다신교, 일신교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물신숭배 단계에서는 가족 단위로 예배를 하고, 다신교에서는 도시 단위가 되지만 유일신의 기독교에 이르면 예배가 인류 전체로 확대된다. 그리하여 종교의 사회적 성격이 더 명확해진다고 바자르는 결론을 내린다.
*참고: 바자르의 이런 가설의 논거는 매우 취약하다. 왜냐면 대규모 국가에서는 종교의 규제를 거의 받지 않으므로 작은 규모 사회가 오히려 대규모 국가보다 종교적 색체가 더 강하다. 실제로 지금까지 역사를 살펴보면 사회제도로서 종교의 중요성을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전제로 바자르는 기독교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주문하고 있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가장 큰 잘못은 물질적인 것과 모든 세속적인 것을 악으로 규정하여 대개 물질적 욕구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억제하였는데, 그 결과 모든 세속적 활동은 교회의 영향력을 벗어나 발달했다. 또 빈곤과 육체적 궁핍을 최우선적인 미덕으로 내세워 산업의 모든 존재 이유를 말살했다. 그 결과 산업은 항상 기독교 외부에 존재했으며, 교회 밖에서 발달한 사회세력들은 점차 교회에 대항하고 교회 교리를 폐기했으며 결국 (세속 질서는) 종교 질서의 파멸로 귀결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교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육체적인 것과 지적인 것을 동등하게 신성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모든 존재가 똑같이 신성하려면 신은 이 모든 것 안에 존재해야 한다’는 이 주장은 “신은 하나다. 모든 것이 신이다.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바자르)는 신의 정의와 일치하며 결국 이는 범신론으로 귀결된다.
바자르의 새종교 해석
종교가 이렇게 모든 것으로 확장되면 사회의 모든 것은 종교에서 생겨난다. 이를 바자르는 모든 사회적인 것은 종교적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거꾸로 신학적 것과 정치적인 것은 (하나님과 세상이 하나의 같은 실재의 두 측면일 뿐인 것처럼) 서로 다른 두 측면일 뿐이라고 이해한다. 과학은 우주를 연구하므로, 신을 이해하는 신학으로 지칭할 수도 있다. 산업의 목적은 세상에 작용을 가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산업을 통해 하나님과 외적 및 물질적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산업은 종교가 된다. 그 결과 (인간과 사회적 기능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는) 성직자는, 산업과 과학 일반을 연결하고, 그 둘이 조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성직자의 역할이며, 이런 의미에서 종교 체계가 사회체계를 통일하며 산업사회는 신정정치 형태를 취해야만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종교는 신학을 위한 과학을 가지고 있고, (과학은 산업에 유용하지 않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산업이 사회의 가장 높은 목표를 구성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산업의 번영 외에는 궁극적으로 다른 목표가 없으며, 성직자의 역할은 다양한 과학 및 산업 기능들의 번영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 체계에서 신을 대중보다 더 고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일 뿐이며, 그래서 성직자는 다른 사람들 우위에 있는 어떤 특이한 성질도 부여받지 않는다. 곧 성직자는 교양 있는 사람, 널리 동정심을 베푸는 훌륭한 지성인일 따름이다.
생시몽 학파 신학에 대한 비판
바자르의 이런 설명은 생시몽의 생각을 잘 해석하는 동시에 그의 문제점을 돋보이게 하는 해석이기도 하다. 곧 생시몽은 원칙적으로 산업적 이익만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요인들이 개입하지 않을 때만 능숙하게 관리하여 균형을 이룬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유기체 안에는 한계를 설정할 수 없으므로 실제로 인간의 욕구는 단순한 물리적 필요를 넘어 무한하다. 따라서 그 욕구에 한도를 설정하려면, 사회적 욕구와 경제적 힘을 억제하고 규제(모두가 권위를 인정하는)하는 강제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에는 불가피하게 산업에서 나오는 권력이 아닌 다른 권력이 필요하며, 그것은 도덕적 강제력이다.
이 점에 대해 생시몽은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체계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자기 체계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하게 되었다. 또 바자르도 종교 체계를 중시했는데, 이는 생시몽 학파가 순수한 산업 조직은 그 위에 또 다른 조직에 의해 완성된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가 사회적 역할을 완수할 수 있게 된 것은 생시몽 신학과는 정반대로 기독교가 하나님을 사물 밖에 두었기 때문이다. 곧 인간의 외부에 또는 인간 위에 도덕적 힘이 존재하고, 그 공인된 대표자인 성직자의 중재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이익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시몽 학파처럼 신이 곧 세상이라면, 신은 그 자체가 도덕적 힘이 아니므로 우리는 신과 동등하며, 따라서 불가결한 계율은 신에게서 나올 수가 없다. 기독교 교리가 주장하듯 물질적 관심이 정신적 관심 아래에 있고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면 물질적 관심은 아주 자연스럽게 정신적 관심에서 억제 수단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 둘이 동일한 수준이고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한쪽을 억제할 수 있는 권한과 힘을 가질 수 없다.
바자르는 사회적 갈등은 대체로 기능과 제품의 불공정한 분배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개인의 지위는 그 개인의 능력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런 난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를 그들의 가치에 따라 정확하게 분류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따라 보상을 받는 체제가 확립되면 그 체계는 곧바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바자르는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모집된 성직자 집단이 이렇게 분류하고 할당하는 일을 잘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이는 쉽게 반박당한다.) 종교도 엄밀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명목적이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 또한 그 체계는 외양적으로만 신정 정치적이며, 산업주의는 아무리 종교가 필요하더라도 그 자체를 넘어설 수 없다.
바자르의 산업주의 체계 비판
바자르의 체계는, 생시몽의 체계에 대한 우리의 비판에서 알 수 있듯, 산업주의와 관련해서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오로지 경제적 이익만 존재한다는 것은 경제적 이익의 포로가 되어 그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바자르는 경제적 이익을 그것을 지배하는 교리에 종속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 교리는 단지 경제적 이익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교리에서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동일한 평면 위에 놓아야 하고, 그러므로 그 교리에서 가능한 유일한 종교는 유물론적 범신론이기 때문이다.
범신론의 신은 우주의 또 하나의 이름일 뿐이며, 인간이 목적을 인지할 수 있는 도덕적 힘을 구성할 수 없었다. 바자르는 산업주의의 종교적 성격을 발전시키면서도 그 결점과 위험을 더욱 부각시켰을 뿐이다. 바자르는 산업생활에 종교성을 주입하면서도 산업활동 위에 아무것도 두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모든 것 위에 그것을 두었다. 바자르는 산업주의를 종속시키는 대신 오히려 강화했다. 그 같은 교리는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생시몽 학교 열풍
1830년대 생시몽 학교의 성공은 절정에 달했다. 1831년 생시몽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학술지 『지구』(Globe)와 『생산자』(Producteur)가 연달아 창간되고, 클라페롱(Clapeyron)이 재무장관으로 취임하는 등 식자층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고 프랑스에서 모든 계층에 걸쳐 수천 명에 달할 정도로 생시몽 사상은 유행했다.
‘신성한 대학’이라는 이름을 단 생시몽 학교는(바자르와 앙팡탱을 수장으로) 입학 지원자 수가 너무 늘어나자 신학교 체제를 본떠 2학년과 3학년이 있는 예비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대학 학생을 충원할 수 있는 일종의 양성기관을 몬시니(Monsigny) 가(街)의 주택에 설치했다. 바자르와 앙팡탱은 그곳에 기거했고 해외에서도 생시몽 생도들이 왔으며 리스츠(Liszt), 아돌프 누리Adolphe Nourrit), 게팽 박사(Dr. Guépin) 등 학자와 예술가들이 야외 행사를 개최하고 살롱을 자주 드나들었으며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서 선전기관과 교육기관도 늘어났다.
바자르와 앙팡탱의 불화
하지만 이런 화려한 외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냉정하고 온건한 지성인인 바자르와 뜨거운 가슴에 거칠고 열정적인 천재인 앙팡탱은 여성문제와 결혼문제를 두고 불화가 불거졌다. 바자르는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에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대우를 주장했으나 앙팡탱은 거의 신성한 매춘이라 할 수 있는 자유연애를 주장했다. 앙팡탱은 성실하고 충실한 남녀의 결혼을 인정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인정하지 않으며 부부 사회-앙팡탱의 표현대로 하면 사랑의 종교-를 유연하고 융통성 있게 하여 집단의 필요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앙팡탱의 과감한 구상은 큰 소동으로 번지고 바자르는 앙팡탱과 결별하였다.
앙팡탱은 몬시니 가에 있는 기관의 대표로 남았고, 그의 영향 아래서 생시몽 사상은 갈수록 무질서해졌다. “1832년 겨울 몬시니 가에서 (젊고 우아한 여성들이 많이 모여들고) 장시간에 걸쳐 축하 행사가 열렸다. 그들은 마냥 춤추고 싶은 욕망으로 춤을 추었지 이런 춤과 쾌락에 종교적 측면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Reybaud, Et s.l. Réformateurs, 107).
이 행사에 많은 경비를 지출한 탓에 재정이 곤란해진 와중에, 경찰은 테부(Taitbout) 가(街)에서 생시몽 사상의 교육을 금지했다. 이런 차이로 올린드 로드리게스는 앙팡탱을 종교적 난잡함을 이유로 고소하고 앙팡탱과 결별했다. 결국 자금이 부족해지자 『지구』의 발행이 중단되었고, 앙탱팡은 끝내 몬시니 가에 있는 집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앙팡탱은 자기 소유의 토지에 있는 므닐몽탕(Menilmontant)에 자리를 잡았지만 1832년 기소되고 결국 투옥되었다. 이로써 생시몽 학파는 마침내 해산되었다.
하지만 생시몽 사상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생시몽 사상은 당대에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오랫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의 정신에 도전했다. 생시몽 사상의 신봉자 가운데 식별력 있고 저명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종사하는 직업에 생시몽 사상을 도입했으며, 한참 지나서 불신하게 되었다. 앙팡탱 일파가 조롱하지 않고 운동 전체를 불신하지 않았다면 생시몽 사상의 영향은 훨씬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