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질주와 성좌인가?
흔히 고전으로 불리는 책들은, 다양한 인간 군상은 물론 인간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시간은 주제이자 대상이면서 서술의 틀이 된다. 남은 것은 세계에 대한 앎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것이 인식의 과정을 통해 어떤 법칙으로 전화하는가이다. 이 책이 인간, 세계, 시간, 인식으로 구성된 까닭이다. 마르크스는 말의 숲을 헤쳐 개념으로 나아가고, 프루스트는 개념의 틈에 빠진 말을 구출하려 한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에서 철학의 임무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데 있다고 썼다. 그로부터 22년 뒤에 나온 『자본』은 그 테제를 실천한 결과다. 프루스트의 작품에는 인간과 사회, 욕망과 앎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때로는 세련되게, 때로는 날것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마르크스가 세계의 구조를 이야기한다면, 프루스트는 그 속살을 수많은 문장과 낱말로 장식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문장들은 ‘새로운 구조’를 향해 나아가려 질주하고, 프루스트의 문장들은 인간의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하늘에 올라 성좌가 되려 한다.
읽기에서 쓰기로,
이 책은 읽기의 소산이다. 저자의 글쓰기는 읽기가 어떻게 책이 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책은 독자의 몸과 정신을 통과한다. 옛 책은 눈으로 들어와 손으로 이동하여 마침내 새로운 책을 거듭난다. 두 번째 문장이 첫 문장에서 풀려나오듯 마지막 문장도 앞선 문장의 부름에 이끌려나온다. 문장이 불러내는 문장이 어찌 한 권의 책에 갇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