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에서 관찰되는 음악의 동시대성
‘악보들’의 출발점은 지금-여기의 음악이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음악이 가진 동시대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모습인가. 예컨대 “동시대 음악 실험에서 ‘멜로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선이 사라지고, ‘음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덩어리가 그 자리를 대체한 현상”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악보들’은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서양 음악사에서 지속적으로 마주치는 두 경향의 운동, 즉 음악의 조건을 극복하려는 (보이려 하는) 움직임과, 반대로 먼 곳으로 향하는 (보이지 않으려 하는) 운동을 우리 신체와 맞닿은 ‘노래’라는 틀로 바라본다. “흥미롭게도 이 두 가지 운동성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협력한다. 때때로 간단히 분리해 내기 어려운 상태로 뒤얽힌다. 하지만 서양 음악사의 흐름에서 특정 경향이 더 강하게 또는 독특하게 운동하는 순간들이 도래했고, ‘악보들’은 그 순간들을 포착”한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며 움직이는 음악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 흔적이 구체적으로 담긴 악보를 통해 긴 여정을 이어 간다.
나쁜 작곡가, 좋은 음악가
1968년 글렌 굴드는 미국의 방송사 NET에 출연해 「모차르트는 어떻게 나쁜 작곡가가 되었는가」라는 TV 강연을 한다. “방송은 모차르트의 후기작 중 하나인 피아노 협주곡 24번을 연주하는 굴드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한참 곡의 중반부를 연주하다 돌연 손을 멈춘 굴드는 이런 말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는 이 곡을 모차르트, 특히 말년의 모차르트가 그다지 훌륭한 ‘작곡가’가 아니었던 이유를 보여 주는 좋은 예로 제안하려 합니다.’”
‘악보들’은 이 굴드의 말로부터 시작해 모차르트 협주곡 24번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상태, 오케스트라와 독주자가 맺는 관계, 관습적인 감각 방식을 교란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선율의 차원에서도, 편성의 차원에서도, 시간의 차원에서도 어느 한 점을 향해 달려가지” 않음으로써 표출되는 노래의 역설이 “결국 시간 위에서 흘러가는 여러 선율을 ‘모두’ 듣게” 만드는 모차르트의 이 곡을 어떻게 바라볼지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