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현대사회를 갈등사회, 위험사회, 피로사회, 불안사회, 분노사회라고 한다. 이러한 우리의 삶 속에는 기분 나쁜 일, 슬픈 감정, 상실감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지배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상을 익히고 따라간다는 사실이 고통이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사회를 넘어 눈물과 한탄, 불안이 오버랩 되는 ‘슬픈 사회’(Sad society)로 변하는 듯하다. “산업화,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라는 찬사가 있다. 그렇지만 그 부(富)의 힘을 행복으로 바꾸는 데는 부족했다. 오히려 슬픔이 사회 곳곳에 암적인 존재로 널리 퍼져 있다. 신종 코로나팬더믹(대유행)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증후군’에 시달리는 모습이다.
주위를 돌아보자. 배우자를 잃고, 자식을 잃고, 재산을 잃고, 치명적인 질병 등으로 인해 ‘통곡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인즉 그러나 슬픔을 느끼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뭔가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살아있는 자기 존재의 징표다. 일상적 감정 표출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슬픔은 뭔가를 잃고 빼앗긴 상태다. 슬픔은 불행한 정신적 고통으로써 어떤 것의 손실로 인한 우울, 비통 등의 어두운 측면을 담고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의 감정 표현이 슬픔이다. 말로는 우리들 슬픔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다. 실존적으로 존재하는 그 순간에 만족이 채워지지 않을 때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고 불안감을 느끼고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국민들의 얼굴에 흐르는 슬픈 눈물로 그 나라의 일상적 불행과 행복감을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행복에 관한 담론들은 많았으나 슬픔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 평가는 거의 없었다. 슬픔이 우리 사회에 만연돼 있는 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슬픔은 철학자, 인문학자, 심리학자에 의해 크게 이론화되지 않았거나 무시되었다. 이제는 슬픔을 진지하게 다뤄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울고 싶다.”라며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슬픔은 고통의 현실을 냉정하게 돌아보게 하는 몸의 반응이다. 단순한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다. 눈물은 자의식이고 우리 삶을 이루는 에토스다. 우리 삶은 서로를 이해하는 도덕심리적 의미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나는 감히 ‘슬픈 사회’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슬픔의 현상’(Phenomenology of melancholy)은 다양하다. 생애과정의 ‘생로병사’에서 보이는 한(恨) 많은 눈물, 슬픔의 거대한 근원을 근대역사 속에서 찾아보면 병자호란, 임진왜란, 일제 침략으로 인한 민족적 슬픔, 남북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들의 슬픔이 있다. 그리고 슬픔의 사회적 재생산구조로써 취업절벽에서 절망하는 청년들, 자주 일어나는 대형참사, 해마다 반복되는 자연재해와 산불 · 홍수 등 일순간에 삶의 터전과 주거지를 잃고 하늘만 쳐다보며 눈물짓는 빈곤층의 기막힌 사연 등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특히 청년들의 얼굴에는 희망보다는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겪는 ‘슬픈 세대’의 모습이 역력하다. 분노와 좌절의 세대 간 갈등, 계층 간 갈등, 고령화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작용하면서 눈물 골짜기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신경학적으로 슬픔과 비참함을 느끼는 정서가 강하게 나타나고 그 뒤를 이어 울음이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한국 사회는 가면극의 탈을 쓴 페르조나(Persona)가 지배하는 사회와 같다. ‘페르조나’란 의식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은폐시키고 남들에게 무력하게 끌려가는 모습을 지칭한다. 본질적으로 내외적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는 자기소외적 신경증에 걸린 상태다. 사회구조상 수직적 사회구조에서부터 내면세계로 연결되는 인격적 관계를 맺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우리 사회는 경직되고 웃음까지 잃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팍팍한 살림살이, 우울한 경제, 짜증과 불신만을 키워가는 정치권 등이 우리의 웃음을 앗아가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 경제는 옛날의 역동적인 코리아에서 어딘지 모르게 ‘스테틱 코리아’(Static Korea) 즉, ‘정체된 코리아’로 바뀌고 있는 모양새다. 스트레스와 고통, 불안으로 점철된 ‘정신병동’과 같은 상태로 슬픈 대하(大河)를 연상케 한다.
또 전통적 가부장제사회 속에서 혹은 나라가 어려울 때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살아가는 아낙네들의 슬픔도 크다. 몽골침략 때는 가시내, 일제강점기는 정신대(위안부), 6.25 전쟁 후는 미군의 ‘똥갈보’라는 수식어가 이 땅에 살아가는 여인들의 슬픔을 반영한다. 특히 위안부 할머니들의 절규는 해방 70여 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피해 할머니들은 “아프면 눈물이 나오지만 고통스러워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라고 외친다. 전쟁에는 마침표가 없다는 말처럼 지금도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쏘아대면서 우리를 공격하려고 한다. 국내적으로는 곰팡이 핀 빵의 현실주의적 가치보다 금테 두른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들이 많은 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그리고 사랑받아야 할 아이들이 부모의 학대, 이웃의 방관으로 고통받는 현실에 애통함을 느낀다. 이 세상에 태어나긴 했으나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채 그 생명을 낳은 미혼모나 가족들에 의해 살해돼 냉장고 속에 사체로 보관되거나 야산에 암암리에 매장된 1천여 명의 영아들, 친아버지와 동거녀에 의한 11세 소녀의 학대사건, 다섯 살 여자 어린이에게 뜨거운 물을 붓고 주먹질하며 학대한 엄마의 잔인성, 생후 16개월 여아 정인이가 양부모에 의해 살해된 사건들에서 사회적 슬픔을 느낀다. 이뿐만 아니다. 실종 아동들의 ‘부모의 눈물’은 끝이 없다. 해마다 미아 발생 4,000건에 실종자가 2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부모들은 “아, 오늘은 찾을 수 있을까?” 하며 거리를 헤매지만 또 헛걸음이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부모의 부재를 얼마나 아파하며 울까? 그 아이들은 필시 울음, 분노, 그리움에 곤죽이 되어 한평생 혈육을 찾아 헤맬 것이다.
본능적인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노인세대들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에서 노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빈곤율은 50%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자살률 또한 세계 최고다. 노후 준비가 안 돼 있으니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피로감만 더해 간다. 갑자기 화를 내거나 분노를 터뜨리고 슬픔에 젖는다. 더구나 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육체적 생존 욕구의 위협에다가 늘그막에 장기간 병원비 마련이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환자를 돌보던 가족이 간병에 지쳐서 간병 살인을 하거나 동반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2021년 기준 보건복지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고독사가 국민 전체 사망자의 1%인 3378명에 이른다. 거기다 치매를 앓는 사람들을 비롯해 생계가 막막해진 자영업자들과 소상공인들은 정신적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1인 가구수가 전체 가구수의 40%에 이르고 있으니 외롭게 지내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어디 그뿐인가? 전국의 복지관 무료급식소에는 하루 수백 명이 허기를 달랜다. 노숙자들이 무료급식을 받으려고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에서 슬픔은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한다. 지붕 없는 거리에서 잠을 자거나 지하도 곳곳에 노숙자들이 잠을 자는 모습에서 비애를 느낀다. 더 끔찍한 것은 갈 곳 없이 헤매다가 목숨을 잃는 노숙인들이 매해 350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하루에 한 명씩 거리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다. 이 모두가 개인의 생애사가 깨진 탓이다. 생물학적 사회적 환경적 요인에 따라 개인의 역사가 거덜난 꼴이다.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전쟁과 폭력으로 인한 슬픔 역시 지구촌을 슬프게 한다. 자연재해, 교통사고, 제노사이트(대량학살), 그리고 크고 작은 전쟁으로 수천만 명이 사망했다. 지금도 러시아 침공으로 인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있다. 이는 불가항력적인 사고나 자연적 재해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증오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 1993년에 개봉된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 ‘쉰들러리스트’(Schindler"s List)에서 볼 수 있듯이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슬픔은 말할 수 없는 아픔이다. 몇 해 전에는 무자비한 IS 참수 동영상에서 인간의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파리테러 사건에서 보면 삶을 개선할 희망조차 차단해 버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11월 19일 한 미사에서 ‘파리테러’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에 대해 “신께서 울고 계신다.”라고 했다.
이렇게 슬픔의 부조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슬픔은 ‘슬픈 현실’(sadness realism)을 반영한다. 깊어지는 슬픔 속에서 싸움 아니면 도망이라는 위기의 심리가 국민들 속에서 싹트고 있다. 인간이 슬프고 불행해지는 이유가 개인이 아닌 사회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사회구조와 행위의 문제, 미시와 거시, 객체와 주체의 2분법이 지배하는 것이 우리 사회 모습이다.
우리는 숨쉬기조차 어려운 퇴화를 경험하고 있다. 전례 없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가 신음한 바 있다.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으로 인한 확진자는 2022년 1월 말 기준으로 세계에서 3억 명에 이르고, 누적사망자는 550만 명으로 늘었다. 우리나라 역시 2020년 말 기준으로 누적사망자가 3만 명에 이르렀다. 코로나 감염증으로 죽은 사람은 ‘애도 받지 못하는 죽음’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사후 24시간이 지나야 화장할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은 감염 우려 때문에 선(先)화장 후(後)장례로 치러졌다. 염습(殮襲)도 불가능했다. 코로나로 죽으면 이런 장례절차 없이 옷 입은 채로 이중 비닐 팩으로 밀봉돼서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가족들 또한 격리조치 되었다. 당사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슬펐다. 치료백신이 나오고 있으나 불멸의 질병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우울증을 불러일으킨다. 슬픔이 강렬하고 오래 지속될 때 ‘슬픔장애’ 혹은 우울장애를 겪는다는 진단이다. 슬픔과 우울증의 현상학적 분석에 기초하여 발생원인, 신경회로(neurocirculatory) 및 ‘생물학적 정신의학’(biological psychiatry)에서 슬픔을 다루는 시대가 되었다. 기분 나쁜 일, 슬픈 감정, 실패감 등 부정적인 감정은 이른바 임상심리학에서 말하는 ‘2차적 장애’(Secondary disturbance)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우려가 나온다. 게다가 기대수명은 크게 늘어나고 있으나 부의 불균형과 이로 인한 의학적 혜택의 불평등 심화는 결국 수명의 생물학적 불평등을 초래하게 된다.
문제는 모두가 사회구조와 무관치 않다는 점, 절망의 한국이라는 인식이 깊게 쌓이면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사회적 슬픔이 분노로 변하기 쉽다는 점, 마음속에 지옥이 만들어지고 미래의 삶이 보이지 않으면 누구나 절망하게 된다. 상실감 내지 불행을 가만히 눈물로만 치유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사회적 원망은 분노로 변할 수 있다. 세상에서 어엿하게 살아가는 ‘활인검’을 만들고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때 슬픔 속에 사회적 저항을 하게 된다. 배려와 협력의 보편적 원칙을 무시하는 동물사회가 된다. 도덕관념이 없는 짐승이 되기 쉽다.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 음란을 구별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이런 슬픈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과 집단, 권력과 민중(지배/피지배), 법과 제도 속에 광범위하게 얽혀있는 사회적 병리의 다름 아니다. 사회적 폭풍(변혁)이 언제 닥칠지 모를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슬픔은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슬픔의 다양성이라고 할까? 이것은 사람들의 정체성과 감정의 복합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슬픔의 주체가 개인의 문제, ‘나’에 대한 슬픔이었지만 최근에 와서는 사회적 관점 또는 사회적 슬픔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삶, 건강, 질병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별, 연령, 장수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사회적 문제이고 이는 생존과 관련된 환경 생태로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슬픔의 사회학’ 영어로는 ‘Sociology of Sorrow’이라는 측면에서 백성들의 슬픔과 눈물을 목격하고 있다.
얼핏 보면 내가 슬픔의 현실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허무주의적 모습을 보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슬픔을 낙관적인 기쁨의 계기로 바꿀 때가 되었다고 본다. 슬픔은 행복만큼이나 우리 삶의 일부이니 그렇다. 나는 우리나라가 과거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21세기는 긍정과 기쁨의 사회 분위기로 변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역사 발전은 눈물을 통해 진보했고 더 살아보자는 갈망의 눈물이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나라에서 눈물에 젖은 빵을 먹으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세계 경제 10위권에 올랐다. 군사력도 세계 6위라고 한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나라인가?
나는 인간이 눈물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슬픔을 느끼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슬픔과 행복은 모두 우리 생명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둘 다 우리의 감정이자 삶의 일부이니 그렇다. 그 감정을 통해 역사적, 사회적 슬픔에서 탈피해 ‘정신 자본’으로서의 마음 건강, 희망과 긍정의 사회로 변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강조하고 싶은 슬픔의 미학이다. 슬픔에서 치유되어야 우리 모두가 새롭게 변화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 변화되어야 슬픔을 알 수 있고 이겨 낼 수 있다. 그 가능성은 대기업들의 창의적인 명품생산은 물론 K-팝의 세계화 즉, 방탄소년단(BTS), 슈퍼앰 등이 세계 정상에 올랐다. 엑소, NCT, 블랙핑크, 몬스타엑스 등의 가수들이 세계 곳곳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K드라마도 북미 유럽에서 인기다. 축구, 야구 등 스포츠 선수들의 세계무대진출에서 기쁨의 눈물을 발견하게 된다. 눈물을 유발하는 정서적 환경, 사회적 조건이 많이 개선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맥락에서 슬픔을 맞이하는 개인의 정신력에 따라서 슬픔의 정도가 다르다는 사실에서 슬픔에 대한 성찰과 치유는 이 시대의 중요한 에토스다. 사람들은 슬픔이 많아서, 행복하지 않아서, 눈물이 많아서, 슬픔의 치유를 통한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된다. 뜻밖의 위로, 용기 있는 위로와 믿음, 미움받을 용기 등의 용어들이 우리의 어려운 현실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우리의 눈물을 믿는다. 존재의 가벼움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가운데 솟아나는 눈물. 눈물은 염기가 들어있다.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소금물이다. 슬플 때 쏟아지는 눈물과 땀, 바다는 짠물이다. 그러기에 모든 걸 정화한다. 자신의 슬픔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치유 방향을 터득하고 행복한 감정을 만들어가는 것은 오직 각자의 몫이다. 다시 말해 자기치유 방식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아름다운 날은 말해도 좋은 날에 나는 슬프고 두려운 주제, 오랫동안 힘들게 걱정해온 주제에 대해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결국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은 각자의 깨달음이고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다. 왜 삶의 과정에서 슬픔이 다가오는지를. 아울러 슬픔을 감성적으로만 쳐다보지 말고 고통이나 외로움, 슬픔의 눈물을 사회적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닦아주는 정책적 고려가 필요한 시대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왜 우리 사회가 정말 ‘슬픈 사회인가?’를 주제로 삼아 현시대 사람들의 개인적이고 사회적 슬픔에 대한 배경 및 사회적 죽음들에 대해 살펴보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무슨 얼빠진 소리를 하는 거야?” 하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현대사회를 ‘슬픈 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인 내 감상이다. 실질적인 사회적 이슈와 고통, 슬픔에 대한 사유와 대처에 대한 처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밑바닥에 깔려있는 슬픔의 원인을 찾아보고 이를 삭이는 과정에서 무엇을 얻고 배울 것인가 하는 것도 고려했다. 단순히 사람이 슬프다는 식의 허튼 진단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방황하고, 깨지고, 상처받으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이 사회가 어떻게 보듬고 치유해주어야 하는 데에 더 의미를 두고 함께 방향을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서다. 슬픔은 영혼의 스트레칭이라는 점에서 생산적인 동력이 될 수 있다. 기쁨의 미소를 껴안은 만큼 눈물도 껴안아야 우리 사회는 더 진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