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은 1831년 11월 14일 61세의 나이에 콜레라 감염으로 갑자기 사망한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헤겔이 《프로이센 관보(Allgemeine Preußische Staats-Zeitung)》에 1831년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세 차례 연재한 것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그의 마지막 글이 되어 버렸다. 이 글이 바로 〈영국 선거법 개혁 법안(Über die englische Reformbill)〉이다.
영국 선거가 야당에게 유리해지자, 새로운 ‘그레이(Grey) 내각’은 1831년 3월 1일 선거법 개혁 법안을 발표한다. 1832년 4월 하원에서 열린 개혁 법안의 두 번째 독회 때 의회 논쟁은 정점에 달하며, 개혁 법안의 최종 비준은 헤겔 사후 1832년 6월 7일에 이루어졌다. 선거법 개혁의 움직임은 프랑스 7월 혁명이 발생한 지 1년 후, 영국 대의제 헌법 개정 직전이라는 민감한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실제로 개혁 법안 이후 1832년부터 영국 의회는 구체제의 성격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헤겔은 자신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전에 이러한 모든 정황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헤겔의 관심은 주로 개혁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정치적 책략의 사회적, 제도적 배경을 분석하는 데 있었다.
한편으로 헤겔은 그의 글에서 영국 사회의 근대성과 합리성의 결핍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기본 주장은 선거권의 단순한 변화만으로는 영국 사회의 구조적 결함을 개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영국 사회의 구조적 결함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선거 제도 개혁만이 아니라 영국의 사회 경제적 조건에 대한 철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 헤겔의 견해다.
〈영국 선거법 개혁 법안〉에서 헤겔은 표면적으로는 영국의 참정권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혁명(Revolution) 문제, 더 정확히는 ‘혁명에 대한 예방책으로서 개혁(Reform)’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 문제는 단순히 선거 제도의 개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볼 때, 헤겔이 영국의 선거 제도 개혁에 회의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재산에 묶여 있는 선거권의 특성 때문에 투표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고, 둘째는 유권자가 국회의원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의회주의에 기초한 대의제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원인이 선거 제도에만 있지는 않다는 것은, 헤겔 당대의 영국뿐만 아니라 현재의 한국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문제다. 그래서 헤겔이 다루고자 한 개혁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민주주의’ 문제와 사실상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헤겔은 선거법 개혁을 통해 참정권의 구조적 결함을 개선하는 것만으로는 여러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충분치 않으며, 이를 위해서는 영국의 사회 경제적 조건에 대한 철저한 개혁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대 양당체제로 굳어져 버린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 중대선거구제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도 이러한 맥락에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선거 제도의 개혁이 진정한 정치 개혁으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선거 제도 자체뿐만 아니라 경제적 양극화 해소와 같은 경제적 개혁, 기득권 학벌 사회를 지양하는 사회 문화적 개혁, 더 나아가 공동선을 지향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식 개혁도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약 2세기 전 헤겔이 문제로 삼았던 당대의 현실 문제들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그 본질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점에서 헤겔의 〈영국 선거법 개혁 법안〉은 분량은 짧지만 시의성 강한 문제들과 관련해 헤겔 철학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