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대를 발판 삼은 100년 문학의 정수
19세기 러시아 문학 거장들의 면모를 크로키해보자. 안으로는 세계로 통하는 섬세하고 평온한 부드러움을 띠고, 밖으로는 소용돌이치는 격정과 열정을 내뿜는 작가이자 러시아 문학의 원천인 푸시킨. 푸시킨이 결투를 벌여 죽었을 때 그 죽음을 홀로 애도했으나, 시인으로서는 격정적이면서도 냉담한 면모를 보여 미움받은 레르몬토프. 순러시아적 토착 문학을 썼고, 사람 좋다는 평을 얻은 고골.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선조 격이며 누구도 뒤따라올 수 없는 문예비평 안목으로 후세 작가들을 찾아낸 벨린스키. 시대의 주류가 산문으로 옮겨갈 때 세계 존재의 어두운 근원을 들여다보는 시를 써 도드라진 튜체프. 러시아적 잉여 인간인 오블로모프를 창조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곤차로프. 그 자신은 사회비평을 목표로 한 듯하지만 정작 미학적이고도 아름다운 서정적 문장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푸시킨을 계승한 투르게네프. 걸핏하면 불끈 성을 내지만 영원한 세계를 봤고, 그 종교적 구원의 이야기를 흥분과 감격의 문장으로 담아낸 거인 도스토옙스키. 본질은 오직 자아만을 추구해나간 에고이스트이나, 작품에 자아의 모든 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거장 톨스토이. 푸시킨을 닮은 명징한 예지의 문체로 도스토옙스키처럼 인간과 그 구원의 가능성을 찾은 체호프…….
더욱이 이 책은 문학적 분석에 그치지 않고 문학에서 역사와 이들 정신의 심연까지 길어올린다는 것이 특징이다. 저자는 러시아인 고유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첫째, 어둡고 음울하며 광대하고 혼돈스러운 자연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며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 둘째, 타타르에게 유린당하고 학대받은 300년 세월의 깊은 각인으로 여전히 자신들은 “괴롭힘당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셋째, 따라서 학살당한 인간 예수에게 체감적 공감을 한다. 괴롭힘당한 자신들의 신앙이야말로 정통이고,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세계를 구원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을 시대 축에 겹쳐놓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우선 타타르 이전의 러시아 정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타타르의 잔학한 지배 아래 처음으로 ‘러시아 정신’(학대받은 사람들의 일그러진 정신)이 형성됐다. 타타르를 무력으로 몰아낸 모스크바 공국을 바탕으로 ‘순러시아적 세계’가 성립됨으로써 피지배층에게는 잔학한 난동을 부렸으나 교회와 결탁해 “세계를 구원한다”는 기만적인 꿈을 심어줬다. 서쪽 창구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세계적 보편성에 뜻을 둔 표트르 대제도 이 ‘메시아주의적’ 세계 구원의 사명감을 계승했고, 이는 훗날 러시아 혁명 정권에까지 이어졌다.
거대한 지하실에서도 환희는 피어난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는 “종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의 내음이 느껴진다”는 것이 저자의 표현이다.
저자가 그리는 ‘러시아적 인간’이란 어떤 부류인가. 서유럽의 지성적인 문화인들과 비교하면 좀더 뚜렷이 부각되는데, 특히 자연과 맺는 관계가 다르다. 과거 수 세기 동안 서유럽의 문화인에게 있어 원초적인 자연으로부터의 유리는 자기 상실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인간의 자기 확립으로 여겼다. 비합리적인 자연의 카오스를 하나씩 정복하면서 빛과 이성의 코스모스로 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분이라 생각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정반대다. 그들에게 원초적 자연성으로부터의 이탈은 곧 자기 상실이자 인간 실격을 뜻한다. 러시아인과 러시아의 자연 그리고 흑토는 피로 맺어져 있다. 이것이 없다면 러시아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서구 문화에 대한 러시아인의 끈질긴 반역은 여기서 비롯된다. 문화의 필요성을 몇 배로 민감하게 느끼고 문화를 열망하면서 동시에 이를 증오하고 반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월등한 무사태평, 자유에 대한 갈망, 극심한 원한…… 물론 작가들은 작품에서 종종 조화로운 러시아를 그리려고 시도했고, 푸시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온화한 빛으로 가득한 평온한 실내에서 문밖의 소란스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창문과 문은 전부 굳게 닫혀 있다. 이는 순수한 내면성의 적막이다. 하지만 바깥에서 무서운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밖으로는 소용돌이치는 폭풍의 포효, 안으로는 영원한 정적과 아름다운 빛. 이는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끓어오르는 정열로 몸도 마음도 남김없이 불태워버리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영혼 중심부에는 이러한 정적 지대가 존재했고, 그것이 바로 러시아적 인간의 내면이다. 그리고 이 불안하고도 불온한 조화는 늘 악령적 힘에 의해 위협받았다.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으로 이러한 흐름은 바뀌어간다. 1840년대를 경계로 일반 독자의 요구는 변해 더 이상 시적인 것에 도취되지 않고 일상의 사실적인 것들을 추구해나갔다. 즉 소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데, 니콜라이 고골이 그 선두에 서 있었다. 이전의 푸시킨이 영웅적 자각을 지녔다면, 고골에게는 그런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지상의 버러지’라 여겼지만 언젠가 맑은 지하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자신의 마음속 토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들 일군의 러시아 작가는 신의 얼굴에 절교장을 던지며 골수까지 무신론적인 자아를 발견해나갔다. 벨린스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고,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속 인물 이반을 창조할 때 벨린스키를 모델로 삼았다.
러시아의 무신론은 신에 대한 선천적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저자는 프랑스 실존주의의 특수한 세계 감각이나 사상적 문제가 매우 러시아적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유럽에서 시작된 현대의 여러 문제는 러시아에서 일찍이 19세기부터 사활을 건 문제로 제기했던 것들이다.
이 책은 체호프에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처음 마주했던 푸시킨의 모습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다. 모든 쓸데없는 말을 배제하고 남은 단순함, 내적인 흥분이 고양될수록 외적으로 더 냉정하고 침착해지는 문체, 깊은 감동을 안에 감춘 채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않는 억제의 예술. 이러한 것은 푸시킨 외에 그 누구도 지니지 못한 시적 특질이었다. 게다가 체호프는 이 훌륭한 시를 산문 형식을 통해 궁극의 한계까지 끌어올렸는데, 이 역시 조용하지만 생생하게 혁명에 대한 예감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