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우려해야 했던 것은 전체주의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은 비상사태이지 예외상태가 아니니까요. 예외상태는 특정 영역을 지배하려는 주권적 의지에서 비롯되지만 비상사태는 자연적인 필요에서 비롯됩니다. 면역은 생물학적일 뿐 아니라 법률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면역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도 직결되는 일종의 보호 체계입니다.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외부의 침입에만 대비할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고유의 면역 체계가 기능하는 방식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면역 체계는 외부의 침략을 막는 장벽이라기보다는 우리 몸의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필터에 가깝습니다. 면역관용에 의해 유지되는 수많은 현상은 바로 면역 체계의 이러한 변증적인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와 사회는 생물학적 체계에서 오히려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 개인의 몸은 물론 사회공동체의 몸도 면역 체계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면역 체계를 지니지 않았던 사회는 없습니다. 법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면역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이 없었다면 분쟁은 전염병처럼 창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와 면역화 사이에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과도하게 적용될 경우 원래 보호하려고 했던 집단의 생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것이 면역이니까요. 이른바 자가면역질환이라는 질병이 이와 흡사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철학자들은 팬데믹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한 채 두 종류의 극단적인 해석으로 치닫는 듯이 보입니다. 첫 번째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음모론적인 해석입니다. 팬데믹을 권력층에서 의도적으로 조장했다고 보는 거죠. 팬데믹이 시민들의 복종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물론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에 대해 염려를 표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한 처사입니다. 아울러 권력의 무게가 입법부에서 행정부로 기울어질 수 있다는 것도 지극히 타당한 우려고요. 이는 비상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어떤 수위를 넘어서는 순간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를 조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한 비상사태의 활성화는 정부의 의도적인 선택에서만 기인하지 않고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한 팬데믹의 폭발이 갑작스레 가져온 필요성에서도 기인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상상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지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 그러니까 공통성과 면역성의 관계는 언제나 균형과 한계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극단적으로 긍정적인 해석입니다. 이는 팬데믹이 사회에 새로운 균형을 가져올 뿐 아니라 평등성의 구도를 재정립하게 되리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 역시 뚜렷하게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 누군가의 주장대로 - 팬데믹이 자유주의와 글로벌화의 종말은 물론 새로운 전체주의의 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견해와 직결되기 때문이죠. 최근 몇 년 사이에 평등성의 구도가 변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이러스의 접촉으로 인해 누구든 죽을 수 있다는 비극적인 차원의 평등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리바이어던 국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홉스가 제시했던 원리, 즉 모두는 평등하지만 그건 모두가 죽음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라는 원리는 사실 긍정적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생명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생명정치와 죽음을 특정인들의 생존 조건으로 간주하는 생명정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 로베르토 에스포지토(팬데믹 관련 인터뷰에서)
에스포지토는 공동체(코무니타스)가 타자를 위한 배려와 선사의 의무를 공유하는 공간인 반면 이 공간을 전제로만 주어지는 면역성(임무니타스)은 개인을 울타리 안에 가두고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이며, 따라서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는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의 상관관계 혹은 메커니즘이 개인의 신체뿐만 아니라 우선적으로는 사회공동체의 몸에 적용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회의 몸과 인간의 몸이 지극히 유사할 뿐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 혹은 사회의 메커니즘이 인간의 신체적인 한계를 사실상 넘어설 수 없거나 이 한계에 얽매이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암묵적인 전제로 제시한다. 그리고 인간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 고유화의 법적 과정과 정치신학, 인류학, 생명정치, 생물학을 중심으로 - 면역의 메커니즘을 발견하고 분석하며 근현대 사회의 가장 심층적인 패러다임이 면역임을 증명해낸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과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심층적인 패러다임은 임무니타스, 즉 면역화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저자는 인간사회의 거의 모든 측면에 면역의 메커니즘이 근원적이거나 구조적인 기능으로 실재할 뿐 아니라 핵심 동력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 사회가 - 따라서 인간의 정신, 이념, 가치가 - 인간의 몸과 다를 바 없는 신체를 지녔고 그것의 근본 구조는 면역학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면역성(임무니타스)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공동체(코무니타스)의 개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자의 해석적 틀인 동시에 열쇠가 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구성원들 간에 공통점이 조금도 없을 때에만 성립되는 것이 공동체다. 정확하게는 모든 구성원의 동일한 차이점을 기반으로 구축되는 것이 공동체다. 동일한 의무사항, 동일한 한계, 동일한 모순, 동일한 병을 -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이에 대한 ‘면역화’를 꾀하면서 - 구심점으로 모이는 것이 공동체다. 이는 사회가 지닌 터무니없이 신체적인 한계, 즉 면역화를 끊임없이 시도해야만 살아남는 ‘몸’의 변증적 모순이 거꾸로 투영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순들이 사실상 포화상태에 이르는 과정은 푸코가 말하는 ‘생명정치’가 완성되어가는 과정과도 일치한다. 이는 에스포지토의 주장대로 ‘생명’과 ‘정치’의 조합이 실행되는 일반적인 범주가 다름 아닌 ‘면역화’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포지토는 푸코의 기획을 어떤 식으로든 완성 단계로 이끈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