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노동운동의 역사를 기록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가능한 요인은 사회경제적 조건이었다. 1986년부터 지속된 3저 호황 속에서 기업들은 연일 최대의 순이익을 올리는 데 반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은 투쟁을 촉발시킬 수밖에 없었다. (…) 노동자들은 최소한 생계유지를 위해서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연장근로, 휴일특근, 야간노동이 일상화될 수밖에 없었다. 부산지역의 경우에는 신발과 섬유 등 소비재 중심의 노동집약적 산업이 압도적이었던 상태로 미루어 더 열악하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_205~206쪽
부산의 개항, 도시형성과 함께한 부산노동운동은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 왔다. 때로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변화와 함께하고 융합하여 일제의 수탈과 자본의 착취에 대항하였고, 때로는 독재정권과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 단결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필자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어떤 상황이나 정세, 또는 어떤 운동적 경향성이 있을지라도 자본주의적 착취나 억압이 있는 경우라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오랜 연구와 실제 경험을 통해 부산노동운동의 사례와 실상을 낱낱이 파고든다.
부마항쟁과 6월 민주항쟁, 1987년 노동자대투쟁 등 굵직한 전국적 변혁운동의 한가운데서 부산 지역의 신발제조업체와 공단 노동자, 택시노동자, 지하철 및 대학의 청소용역노동자, 콜센터 고객센터 비정규직 노동자 등이 어떻게 노동운동을 해왔는지에 집중 주목하여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핀다. 각 노동운동이 일어난 발단과 전개, 그 정책적 배경을 상세히 기술하고, 해당 노동운동의 의의를 밝히는 과정을 면밀히 훑어나가 보면, 현재에 도달하기 위해 부산이라는 지역에 응집된 노동운동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 노동자의 삶은 계속되고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김동윤 열사는 고유가와 운임저하로 인해 생계파탄에 이른 화물노동자의 대표적인 사례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부가세를 미납하게 되었고 미납금액이 1,200만 원에 이르게 되었다. 체납세금을 갚기 위해 수영세무서와 상의하여 (…) 유류보조금을 받을 때 생계비로 써야 하니 50만 원만 공제하고 나머지는 돌려달라는 부탁을 했고 세무서 측에 이에 대한 약속을 받고 각서를 써주었다. 그러나 부산시의 유류보조금 환급 시 보조금 전액을 세무서가 압류하면서 모두 가져가 버렸다. 추석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고 김동윤 열사의 통장 등은 모두 압류 조치되어 있었다. 분신 당일 오전에 김동윤 열사는 화물연대 부산지부 상근자에게 전화하여 “유류보조금을 세무서가 압류해 갔다. 어려워서 못 살겠다. 신선대 앞에 있다”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고 분신했다.
2002년 화물연대 출범 이후 3년간 무려 66명의 조합원이 사망했다. 가히 ‘죽음의 행렬’이라 부를 만했다. 이 가운데 25%가량은 늘어나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_477~478쪽
현재에도 노동자들은 생존 위기에 처해 있다. 대기업, 공공부문을 제외한 대다수의 노동자들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은 단결, 조직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계속 이어지고, 노동자의 삶 또한 계속되기 때문에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미래는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노동관계가 예상되는 만큼 더욱 창의적인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노동운동의 혁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