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타임스〉 선정 “전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
뮤리얼 스파크가 꼽은 자신의 최고작
〈더 타임스〉 선정 “전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
뮤리얼 스파크가 꼽은 자신의 최고작
존재하지 않는 음계 ‘Q 샤프’ 장조,
그 소름 끼치는 긴박감으로 그려내는 여성, 범죄 그리고 욕망
《운전석의 여자》는 닮은 소설을 찾기 힘든 기이한 소설이다. 그저 ‘여성이 주인공인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말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모든 전형성은 비껴간다. 전후 영국의 최고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뮤리얼 스파크가 이 소설을 자신의 최고작으로 꼽은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어떤 해석도 거부하는, 위태롭지만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소유자인 주인공 리제에게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동시에 감당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여성의 실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표제작 〈운전석의 여자〉는 출간 후 5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독자에게 서늘한 긴장감을 안긴다. 아니, 오히려 여성 서사가 특정한 방식으로 정형화되어가는 요즘, 작품이 전하는 긴박감은 더욱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운전석의 여자〉의 주인공 리제는 까탈스러운, 그 생각을 알 수 없는 여성이다. 쇼핑을 하다 느닷없이 점원에게 버럭 화를 내고, 휴가를 앞뒀으니 먼저 들어가 보라는 상사 앞에서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린 후 이내 펑펑 울어버리는 식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색상의 옷을 제멋대로 걸치고, 내내 있지도 않은 남자친구를 찾아다니며, 마침내 만난 적당한 남자에게 “나를 죽여요”라고 부탁한다. 독자 역시 소설의 화자와 같은 질문은 던질 수밖에 없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체 누가 알겠는가?”
“완전하고도 독창적이다. 그녀를 따라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디펜던트〉
예나 지금이나, ‘운전하는 여자’는 손가락질받는다. 여자가 운전석에 앉는다는 건 직접 핸들을 쥐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향할 수 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운전석의 여자’는 늘 위험한 존재였다. 리제는 여성이 운전석에 앉았을 때 생길 수 있는 불안과 긴장을 가장 극적이고 기괴하게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을 반복하며 가부장적 상식의 경계를 제멋대로 넘나든다. 리제에게 남자친구로 삼기에 적당하다고 지목당한 남자들의 반응을 보자. 그들은 겁을 먹고 시선을 피한다. 불안정한 기색으로 깜짝 놀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는 공포가 가득해진다. 반면 리제를 응징하고자 하는 남자들도 있다. 리제를 강간하려는 두 남성 인물은 자기 욕망을 가진 여성을 향한 가부장제의 통제 욕망을 대변한다.
리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어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남자를 ‘위협’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폭력적으로 단죄당한다. 즉, 자기 욕망을 가진 여성 리제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그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내내 부유한다. 매끄럽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리제의 행적과 “나를 죽여요”라는 그녀의 최후 요청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합성을 획득한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욕망함으로써 자신의 오롯한 존재를 거부하는 세계에 저항하려는 시도로 리제의 요청을 독해할 수 있는 것이다.
스파크 특유의 익살 섞인 시니컬함으로 포착한
여성과 삶에 대한 서늘한 아이러니
이 책에는 표제작 〈운전석의 여자〉 외에도 10편의 단편이 실렸다. 〈치품천사와 잠베지강〉은 뮤리얼 스파크가 7,000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옵서버〉 단편 소설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스파크는 본격적인 소설가 경력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딸들〉, 〈관람 개방〉은 부녀 관계, 부부 관계에 대한 스파크의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여성이 아버지나 남편을 매개해서만 존재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사회상을 비틀며 아버지와 딸,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무엇에 토대해야 하는지를 질문한다.
〈하퍼와 윌튼〉, 〈핑커튼 양의 대재앙〉은 스파크의 유머와 재치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하퍼와 윌튼〉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이 한창이던 때의 두 인물이 등장한다. 여성 참정권 내부의 역동과 갈등, 더불어 여성 인물의 성애적 욕망과 그들을 향한 성적 괴롭힘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여성 참정권 운동의 시대와 동시대의 독자를 익살맞게 연결한다. 〈핑커튼 양의 대재앙〉은 남자의 말과 여자의 말이 서로 다른 무게를 갖는 사회가 배경이다. 작품은 이를 반전시킬 수 있는 여성의 전략 중 하나를 소개한다. 핑커튼 양이 보여주듯, 더 낮은 위치는 때때로 반격을 위한 그럴싸한 토대가 되어준다.
〈검은 선글라스〉, 〈포토벨로 로드〉에서는 비밀을 아는 여성 인물이 나온다. 두 작품에서 여성 주인공들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토대로 이야기를 펼쳐낸다. 두 주인공이 알고 있는 비밀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폭력에 관한 것이다. 폭력 이후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히 굴러가는 세계에서 두 주인공이 품은 비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자그마한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스파크 소설 특유의 긴장감은 독자를 그 균열의 지점으로 초대해 이 균열을 더욱 확대한다.
〈이교의 유대 여인〉, 〈오르몰루 시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가진 두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이들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는데, 작품의 화자는 그 안에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안락함과 단단함을 본다. 두 작품은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문학적 응답이 되어준다.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인 〈운전기사 없는 111년〉은 한 허풍쟁이의 거짓 자서전에 실린 가족사진을 소재로 한다. 역설적이게도, 도둑질당한 사진에서 자기 꿈을 이룬 한 인물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삶에 깃든 웃지 못할 아이러니를 마주한다.
누구도 도달한 적 없는 여성 서사의 ‘기괴한’ 다채로움
그 색다른 문학적 쾌감으로의 초대
《운전석의 여자》에 실린 11편의 중단편은 그 자체로도 매혹적인 이야기다. 스파크 특유의 익살 섞인 시니컬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절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담긴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때, 작품을 읽는 재미는 배가된다. 수십 년 전 출간된 스파크의 작품이 지금 번역되어 소개되는 것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스파크의 여성 인물들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어딘가 낯선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내내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그녀의 작품은 독자에게 말끔히 해석되지 않는 잔상을 남겨 그 의미가 무엇일지 고민케 한다. 여성 서사의 범람이라는 환영할 만한 현상이 전형적 서사의 확립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인상이 드는 요즘, 스파크의 작품은 매끄럽게 해석될 수 없는 기괴함으로 여성 서사에 다시금 생기를 부여한다. 〈운전석의 여자〉에 나오는 ‘Q 샤프 장조’라는 표현은 줄곧 스파크 작품의 특징을 절묘하게 포착한 말로 여겨졌다. 존재하지 않는 음계인 Q 샤프 장조로 연주되는 다채로운 여성 서사에 주목해보자. 동시대의 여성 서사와는 또 다른, 색다른 문학적 쾌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