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트 아트는 메시지가 담긴 미디어다!
그동안 그라피티 혹은 스트리트 아트에 관한 분석은 미술사학자, 저널리스트, 사회학자들에게 맡겨졌다. 저널리즘이나 사회학의 시선은 차갑고 건조하다. 미술사의 시선은 미술이라는 거대한 서사에 그라피티를 끼워 넣을 뿐이다.
저자는 과거의 그라피티가 뉴욕의 청소년 컬처나 힙합 문화와 함께 해석된 것처럼, 스트리트 아트 역시 스트리트 컬처와 함께 이해해야 할 문화 현상으로 바라본다. 마셜 매클루언이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라고 했듯이, 그는 그라피티와 스트리트 아트야말로 ‘메시지가 담긴 미디어’이며 우리 세계의 변화와 징후를 대변할 수 있는 강력한 매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통찰은 지금의 스트리트 아트를 바라보며 느끼는 슬픔에서 글을 시작한다. 책 제목인 ‘스트리트 아트는 거리에 없다’라는 선언적인 명제는 더 이상 거리의 문화가 거리에 없다는 향수 어린 애수와 함께 거리의 한계를 넘어 점차 주류화되고 있는 스트리트 아트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스트리트 아트는 과연 무엇이었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에 대해 애정과 비판의 양날로 날카롭게 되묻는다.
“일평생 그림을 그린 내가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슬픔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거리 문화가 더 이상 거리에 없음에 대한 애수를 기록하고 싶었다. 거리(street)는 무협 소설 속의 ‘강호’처럼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남몰래 스프레이 페인트를 뿜어낼 때면 반드시 나타나는 상황적인 단어였다. 하지만 도시의 잉여 공간이 빠짐없이 ‘영업’의 공간으로 변모되면서 스트리트 아트는 환경 미화 활동 내지는 기업체 홍보 활동의 보조 수단으로 전락했다. ‘합법적’인 거리의 예술가들이 선발되었고 그것에 반대하는 이는 스스로 도태되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고 그 변화가 나를 아프게 했다.” (서문 중에서)
그라피티 열차에서 뱅크시까지
이 책에서 저자는 그라피티 아트의 탄생을 알린 ‘그라피티 열차’에서 출발해 장미셸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이라는 걸출한 아티스트의 출현,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라피티의 전설로 불리는 돈디 화이트, 씬, 스테이 하이 149, 푸투라 2000을 비롯해 카우스, 셰퍼드 페어리 등 그라피티와 스트리트 아트계의 계보를 훑어간다. 또한 이미 주류 미술계에서도 독보적인 아티스트로 떠오른 ‘뱅크시’라는 존재가 스트리트 아트에 끼친 영향, 그의 콤플렉스와 페르소나 그리고 ‘개입’의 전략을 분석하는 대목은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뱅크시는 스트리트 아트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2000년대 중반, 뱅크시가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 자신의 작품을 무단으로 전시한 사건이 세계적인 이슈로 부상한다. 그때 국내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우리의 그라피티는 낙서고, 뱅크시가 하는 건 예술이야?” “스프레이를 사용하지 않은 그라피티가 스트리트 아트인가?”
저자는 뱅크시가 그라피티의 전통적인 행동 양식과 태도를 중시하면서도 의식적으로 그 핵심 요소인 태그-피스를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배제하는 양상을 통해 그가 그라피티에 대해 갖고 있는 양가 감정(애정과 애증) 혹은 콤플렉스를 파고든다.
특히 2013년 뉴욕에서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뱅크시가 남긴 그라피티 작품은 우리가 잘 몰랐던 뱅크시의 또 다른 이면을 드러낸다. 전 세게 곳곳에 남긴 뱅크시의 작품들은 그려지고 나서 일주일이 지나기 무섭게 벽이 통째로 도난당할 만큼 열광적인 인기를 누리지만 뉴욕에서는 (현지의 그라피티 라이터로 추정되는 이들에 의해) 훼손되기 바빴다는 사실은 그라피티와 뱅크시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스트리트 아트를 알면 컬처 트렌드가 보인다
스트리트 컬처를 단순하게 정리하면, 세 지류가 모여서 이룬 큰 강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힙합을 중심으로 한 뉴욕의 청소년 문화, 둘째는 만화-애니메이션과 게임 같은 서브컬처와 마니아 문화, 마지막으로 스케이트보드와 보드서핑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 문화와 펑크적 정서의 혼합이다. 힙합은 문화의 프로세스를, 만화나 게임은 소스를 제공한다면 익스트림 스포츠와 펑크적 정서는 스트리트 컬처의 정신적 세계관을 관장한다.
스트리트 아트는 스트리트 컬처의 다양성을 먹고 자란다. 이 책에서는 티셔츠, 스니커, 힙합, 그리고 가장 힙한 스케이트보드 브랜드인 스투시와 슈트림에 이르기까지 스트리트 아트와 스트리트 컬처의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 이들의 공통적인 바이브를 살펴본다. 특히 스투시와 슈프림은 스트리트 컬처의 마이너적인 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1990년대의 스트리트 아트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길거리의 문화가 고급 상품으로 전유되기 시작했고, 그 정점에 루이 비통이 등장한다.
왜 루이 비통, 샤넬 같은 럭셔리 브랜드들이 스트리트 아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걸까? 저자는 미래 세대의 취향을 선점한 명품 브랜드의 브랜딩 전략을 살펴보면서, 지금의 컬처 트렌드를 비판적으로 리뷰한다.
이제 현대미술의 하위분야가 아니라 ‘스트리트 아트’라는 그 자체의 장르로 진화하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는 우리가 막연히 추측하고 있는 스트리트 아트와 스트리트 컬처의 ‘융합’이 거대한 물결로 주류 문화 속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스트리트 아트가 떠난 자리
이 책은 엉터리 랩을 지껄이며 거리를 거닐던 10대 시절, 거리의 한쪽 벽에 몰래 그라피티를 남기고 도망치던 20대 시절을 관통하면서 ‘스트리트 컬처는 곧 나의 인생이며 자유의 원천’이라고 외치던 한 아티스트의 애잔한 비망록이자 내부자의 시선으로 조망한 스트리트 아트의 역사이다.
과거 돈디 화이트는 인터뷰 중에 “언젠가는 우리가 만든 이 문화를 소비하는 시대가 올 거야”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슬프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직접" 하는 것이 ‘구매"하는 것보다 더 즐겁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을 따름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