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농구 현장을 취재한 전문기자 출신이며 체육사를 전공한 학자로서 집요하게 우리나라 농구의 근현대사 연구에 천착해온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가 최근 또 하나의 역작 「농구인 김영기」를 출간했다. 허 교수는 1994년 「농구 코트의 젊은 영웅들」을 출간한 이후 「농구 코트의 젊은 영웅들 2」(1996), 「길거리 농구 핸드북」(1997), 「아메리칸 바스켓볼」(2013), 「우리 아버지 시대의 마이클 조던, 득점기계 신동파」(2014), 「맘보 김인건」(2017), 「바스켓볼 다이어리」(2021)를 잇따라 펴냄으로써 한국 현대 농구사를 다시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허 교수는 자신의 여덟 번째 농구 서적인 「농구인 김영기」에서 광복 이후 우리나라 농구를 인물 중심으로 검토하면서 한 시대를 갈음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로 여자농구의 박신자와 함께 남자농구의 김영기를 지목한다. 김영기가 은퇴 직후인 1966년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집 「갈채와의 밀어」와 2004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회고록을 바탕으로 각종 기록을 세심히 검토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두루 살피고 있다. 이와 같은 고찰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김영기는 한국 남자농구 역사상 광복 이후 등장한 첫 대중스타로서 국내외의 인정을 받았으며 스포츠팬은 물론 대중의 신뢰를 얻었다. 김영기는 한국농구의 기술 수준이 향상되기 이전에 농구에 입문했으나 미국인 코치 존 번의 짧은 지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기술을 스스로 개발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훈련하여 매우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확보함으로써 국제적인 경쟁력을 발휘한 드문 사례에 속한다. 그는 1956년 멜버른올림픽과 1964년 도쿄올림픽, 1964년 프리올림픽에서 세계 유수의 팀과 선수를 상대하며 뛰어난 기량으로 명성을 얻었다. 한국 남자농구는 김영기가 프리올림픽에서 크게 활약한 데 힘입어 1964년 도쿄올림픽 출전 자격을 획득하였다.
국제무대에서 빛난 김영기의 경기력은 탁월한 개인기라는 특징으로 요약된다. 김영기는 트위스트 슛, 원 핸드 슛, 빠르고 다양한 드리블을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익혀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김영기가 존 번의 지도를 받았다고는 하나 구체적 기술을 배웠다기보다는 일찍이 품고 있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 의구심을 해소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기술을 몸이 익히기 위해 훈련 방법도 스스로 개발해 적용하였다. 그를 통하여 뛰어난 지도자의 자극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선수의 발전에 있어 물리적 자질 외에 선명한 목표의식과 창의력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남자농구는 1967년 도쿄 유니버시아드 준우승, 1970년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 11위 등 짧게나마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발휘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2023년 현재 한국 남자농구는 동아시아의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필리핀, 중동의 이란 등에 밀려 아시아에서도 정상 도전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현재의 경기력으로는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러한 현실을 돌아볼 때 김영기가 온 생애를 던져 관철한 창의와 도전, 개인적 분발과 성취의 기억은 훌륭한 본보기요 교훈으로서 긴 여운을 남긴다.
김영기는 은퇴 후 방송해설자와 코치로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1969년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와 1970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을 아시아 정상으로 이끌었다. 1970년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11위는 한국의 역대 최고 성적으로 남아 있다. 김영기가 지도한 국가대표선수들은 김인건, 신동파, 김영일, 이인표 등 그의 대표선수 경력 후반기에 함께 활약한 후배들이 주축이었다. 이들 후배 세대는 학생 시절부터 김영기를 흠모하고 그의 기량을 선망했으며 배우기를 원했던 선수들이다. 김영기의 유산은 김인건, 이인표, 방열, 신동파 등으로 이어졌고 이들은 훗날 농구 지도자가 되어 한국 남녀농구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그러므로 김영기의 영향력은 세기를 넘어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미개발 시기의 우리 스포츠 토양에서 스스로 싹을 틔워 국제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확보한 김영기는 농구를 넘어 스포츠와 관련 부문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한 중심인물이다. 김영기는 인기 있는 스포츠 스타의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유명인사(Celebrity)로서 바람직한 일면을 제시하였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한국의 체육인이 폭증하고 한국 스포츠가 대중적인 문화산업으로 성장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기에 이른 현실을 감안하면 김영기의 선구자적 업적과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의 발전적 계승이 필요하다.
김영기 프로필
1936년 1월 7일 서울 출생. 배재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법학과 졸업
1956년~1964년 농구국가대표(멜버른/도쿄올림픽,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 출전) / 1969년~1975년 농구국가대표 지도자(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우승) / 1976년 중소기업은행 지점장 / 1980년 대한체육회 이사 / 1982년 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 1983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한국 선수단 총감독 / 1985년 대한체육회 선수자격 심사위원장 / 1988년 신용보증기금 전무이사 / 1989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 1991년 신보창업투자 대표이사 / 1996년 KBL 전무이사 / 1999년 KBL 부총재 / 2002년~2004년 제3대 KBL 총재 / 2014년~2018년 제8대 KBL 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