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독서만으로
미국 명문대 장학생으로 선발된 23세 청년
가열한 지적 도전으로
인류가 도달해야 할 현대의 길을 찾다!
“반짝인다고 해서 꼭 금은 아니다.” 그렇다. 남국의 태양 아래서 우아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인플루언서의 인스타 스레드, 모 브랜드의 앰버서더가 된 그 연예인이 들고 있는 바로 그 명품, 세계 유수의 IT기업 CEO가 프레젠테이션에서 들고 있는 미공개 신상템, 유튜브 알고리즘이 찾아낸 인기 급상승 동영상, 그것들 모두 반짝이지만, 당신의 삶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주는 어떤 진짜는 아니다.
한 가지만 따져보자. 그런 반짝임을 보았을 때 당신은 과연 자유로워지는가? 그것이 정말 자유라면, 당신은 더 창의적이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고, 당신의 내면에서 충족되는 자율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마주한 사람들을 보라. 그저 어떤 정해진 행동으로 - 클릭과 좋아요와 구매 버튼으로 - 어쩔 수 없이 내몰리고 있지 않은가? 그 우상들은 가짜다.
“순전히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현상들을 신성시하고 절대시하는 것은 우상숭배일 뿐이며 그런 우상은 언제나 그 적들을 파괴하게 만든다.”
_캐런 암스트롱(1944~ , 비교종교학자)
이 책의 저자, 윤동준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집에 칩거하게 된 십대 청소년이었다. 스스로를 골방에 유폐시키며 책을 탐닉했고, 이런 독서의 경험으로 미국 유수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 라파예트 칼리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성적 순위 상위 2%의 학생에게 주어지는 혜택이었다. 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류의 고전에서 어떤 진짜를 찾는다. 단순히 대입 대성공의 경험 때문은 아니다. 고전에 진리가 들어 있어서만도 아니다. 우리 현대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공중으로서의 책임윤리를 세우는 길이 그 고전읽기에 들어 있어서다.
현대인은 소셜미디어, 커뮤니티, 타인의 의견에 휩쓸리며 산다. 인터넷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 것이라는 한때의 소망은 착각에 가까웠다. ‘딸깍’이라는 유행어(마우스를 반복하여 클릭하는 소리에서 유래)는 오늘날 청년세대를 옭아맨 사유 없는 단순성을 잘 보여준다. 누구도 그들에게 결정권을 주지 않는다. 가능성을 수여하지 않는다. 결과는 사회에, 청년세대에 만연한 무기력함이다. 이것이 무책임한 개인을 낳는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고전은 진리 그 자체는 설령 아닐지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론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괴물이 되지 않고, 호기심이 있어야 우연에 지배당하지 않고, 의심이 있어야 인습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사람들이 진정한 자율성과 책임감을 갖춘 개인들의 집합, 공중으로 진화할 때, 현대를 사로잡은 무기력함을 타파할 수 있다.
현대는 왜 퇴보하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은
타인의 의견에 하트를 누를 자유가 아니다
여기서 저자는 유튜브를 끊어라, 인스타를 멀리하라, 또는 쿠팡이나 배민 앱을 지워라, 그런 직관적이면서도 실용적으로 느껴지는 요구를 독자에게 건네지 않는다. 그것들은 원인이 아닌 결과이고, 더 근본적인 문제점을 타파하지 않으면 앱을 지워 봤자 어차피 또 깔게 될 것이니까. 단톡방에서 떠도는 가짜뉴스를 피해야 한다는 막연한 지적보다 진리와는 상반되는 직관적 의견의 한계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잘못된 후보를 선거에서 뽑지 말아야 한다는 선언보다 영웅숭배의 함정을 깨닫는 게 더 중요하다.
그렇게 의견의 우상, 영웅의 우상, 소유의 우상, 능력주의의 우상, 욕망의 우상, 직관의 우상, 환원의 우상, 공감의 우상, 신념의 우상, 전문가의 우상, 상대주의의 우상, 염세의 우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꿈꾼다. 여기서 새 세대란 꼭 청년세대를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100세 시대, 80대 노인에게도 아직 강산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시대다. 그리고 우상 파괴도 꼭 청년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요새는 중장년들이 유튜브 더 열심히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