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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실연, 병고와 실의의 만 29년을 살았던 유정(裕貞)은 죽은 후에 안장될 땅을 못 구하여, 그가 남기겠다던 결핵균과 함께 한 상자의 재로 화한 채 한강에 흩날려 내려갔다.
강원도 춘천에서 2남 6녀 중 일곱째, 차남으로 태어나 귀엽게 자라다가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읜 후 여덟 살에는 아버지마저 잃어 삼촌과 형, 누나를 번갈아가며 보호자로 삼았던 그는 따라서 정서적으로 항상 불안하고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후일 기생에 대한 짝사랑 편지는 그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습작기의 문장 연습이 되었으며, 이는 또한 작품 〈두꺼비〉의 모체도 된다. 그가 짝사랑한 많은 기생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일찍 가버린 어머니상(像)의 추구에서 나온 것이었다.
열두 살 때 제동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면서 신학문의 첫 걸음을 내디딘 그는 이어 휘문고보 시절에 안회남(安懷南)과 같은 반에 다녔다. 이어 연희전문 문과를 중퇴한 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창작에 정열을 쏟은 것이 유정의 일생이었다.
그의 생애를 편의상 나눠보면, 출생 후부터 연희전문을 중퇴하기까지를 성장기로 부를 수 있다. 이 정신적, 문학적 성장기를 그는 3·1운동의 좌절 이후 반민족적인 탄압 아래서 프로 문학과 국민 문학이 날카롭게 대립하던 속에서 보냈다.
이어 제2기는 연희전문을 중퇴한 후 데카당(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허약과 파산과 실연으로 방랑하던 1929년부터 1931년까지의 시기가 된다. 그 이후 유정은 일단 데카당의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하여 그곳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하는 한편, 습작기를 지나 문단에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방랑을 청산한 1931년부터 작고하기까지를 제3기로 부를 수 있다.
이처럼 유정은 성장기·방랑기·창작기라는 3기의 각각 특이한 생활을 하면서 짧은 창작 기간 중 우리나라 단편문학사에 귀중한 작품들을 남겨주었다.
《김유정 전집》에 실려 있는 26편의 소설의 무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산촌이나 농촌을 무대로 한 것이 12편, 서울이 무대인 것이 11편, 광산촌이 1편, 기타 2편이다.
여기서 산촌과 농촌을 무대로 한 작품은 거의 예외 없이 강원도 그의 고향처럼 빈촌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은 그의 생애 제1기와 제2기의 영향을 받고 쓰여진 작품들이다.
서울을 무대로 한 것은 학창 시절과 제3기의 영향에서 쓰여진 작품이 많으며, 광산을 무대로 삼은 것은 제2기의 방랑기 때 직접 체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유정의 경우 그의 체험은 곧 자신의 문학이었다. 그는 겪지 않고 가보지 않은 곳은 무대로 삼지 않았다.
다시 그의 26편의 주요 작품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 중 50명을 골라 그 직업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소작인·머슴 22명, 자작농·마름 2명, 지주 3명, 학생 3명, 기생·바 걸·들병이 11명, 노동자·여공 3명, 무직 4명, 상인 1명, 기타 1명(거지아이).
소작인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의 경우는 거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인공들의 학력은 거의 없고 학생이나 전문학교 출신이 몇 명 있을 뿐이다.
유정이 작품 활동을 했던 1930년대의 농촌은 식민지라는 굴레에 봉건주의적 억압이 있었던 두 개의 사슬을 가진 감옥과 같았다. 따라서 그의 소설의 주인공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작인이나 머슴들의 생활은 곧 1930년대 한국 농촌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소작인들의 이익을 가로채가는 농민의 적을 세 가지로 나눠서 작품 속에다 그려주고 있다. 즉 지주와 마름, 각종 세금과 부역, 관리들의 횡포와 진흥회 등의 간섭을 내세우고 있다.
유정은 작품 속에서 지주나 마름을 곱게 그리지 않는다. 마치 고대소설에 나오는 악의 화신처럼 이들을 묘사해준다.
(1) 하나 인심을 정말 잃었다면 욕보다 읍의 배참봉댁 마름으로 더 잃었다. 본디 마름이란 욕 잘하고, 사람 잘 치고, 그리고 생김 생기길 호박개 같아야 쓰는 거지만……. (〈봄 봄〉에서)
(2) 올 농사는 반실이니 도지도 좀 감해주는 게 어떠냐고. 그러나 지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모로 흔들었다. 정 이러면 일 년 품은 빼야 할 테니 나는 그 논에다 불을 지르겠수, 하여도 잠자코 응치 않는다. (〈만무방〉에서)
(1)은 마름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뻔뻔스럽고 비인도적이냐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2)는 지주들의 도조(賭租)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이와 같은 지주와 마름에 대한 간접적인 비난은 〈금 따는 콩밭〉, 〈소낙비〉, 〈동백꽃〉 등에도 가끔 나타난다. 〈동백꽃〉은 마름의 딸에게 소작인의 아들이 꼼짝없이 당하는 이야기며, 〈소낙비〉는 지주 신분의 사람에게 소작인의 처가 돈을 얻기 위해 당하는 이야기다.
그 다음 소작인들을 괴롭혔던 각종 세금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3) 가혹한 도지다. 입쌀 석 섬, 보리, 콩 두 되의 소출은 근근 댓 섬. 나눠 먹기도 못 된다. 본디 밭이 아니다. 고목 느티나무 그늘에 가리워 여름날 오고가는 농군이 쉬던 정자터이다. 그것을 지주가 무리로 갈아 도지를 놓아 먹는다. (〈총각과 맹꽁이〉에서)
(4) 요즘 눈바람은 부닥치는데 조밥꽁댕이를 씹어가며 신작로를 닦는 것은 그리 수월치도 않는 일이었다. 떨면서 그 지랄을 또 하려니 생각만 하여도 짜장 이에서 신물이 날 뻔하다 만다. (〈솥〉에서)
(3)은 지주에게 바쳐야 할 도지에 대한 서술이다. 소작료가 일찍이 우리 나라만큼 높은 곳은 없었다. 가장 많은 것으로는 생산량의 9할을 받았던 경기도에서, 적기로는 평북의 2할까지 있었다고 한다. 유정의 소설 배경이었던 강원도는 대개 5할 전후였다고 한다. (4)는 일제(日帝)가 그들의 착취를 보다 쉽게 하기 위하여 신작로를 닦는 데 강제 부역을 시키던 일을 말해주고 있다. 이 밖에도 유정의 작품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수리조합비, 철도 부설 부역 등 허다한 수탈과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것이 당시의 농민들이었다.
특히 소작료가 비싸 자신이 지은 농사를 밤중에 몰래 훔치다가 자기 형에게 들켜 무안을 당하는 〈만무방〉은 당시의 소작인 생활을 실감 있게 그려준 걸작이다.
마지막으로 각종 집회와 관리들의 횡포에 의한 농민들의 괴로움을 보여준 것으로는 진흥회가 나오는 〈총각과 맹꽁 이〉와 농민총회가 등장하는 〈솥〉 등이 있다. 진흥회란 1930년대에 일제가 만든 농민 탄압 단체였다. 즉 소작인들의 쟁의를 사전에 탐지해서 그 활동을 막으며 쓸 공출을 잘 내도록 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황국(皇國) 농민을 만들려는 일종의 계몽적 성격을 가진 어용 단체였다. 이 진흥회가 농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피곤한 농민들을 더한층 못살게 굴었다.
이상 1930년대의 농촌 문제 세 가지를 유정의 작품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의 작가적 한계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농촌에서는 소작인 조직이 생겨 지주들에 대항한 투쟁이 맹렬히 일어났었다. 그들의 최대 쟁점은 소작료 3대 7의 비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정의 작품에는 결코 지주에게 덤비는 농민은 하나도 없다. 〈만무방〉의 응칠이가 지주의 뺨을 갈기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 그는 소작인으로서의 농민이라기보다는 부랑자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유정이 그린 소작인들은 왜 그들이 못 사는지, 무엇이 그들의 적인지를 몰랐다. 이것은 곧 작가 김유정이 갖는 인생파적인 한계에서 온 것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무척 아쉬운 감을 주는 것이다.
그럼 유정의 작품 무대 중 제2위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과 이에 관련된 관료관(官僚觀)은 어떤지 살펴보자.
(5) 대도시를 건설한다는 명색으로 웅장한 건축이 날로 늘어가고 한편에서는 낡은 단층집은 수리조차 허락지 않는다. 서울의 면목을 위하여 얼른 개과천선하고 훌륭한 양옥이 되라는 말이었다. (중략) 기름때가 짜르르한 헌 누더기를 두르고 거지가 이런 상점 앞에 버티고 서서 나리! 돈 한 푼 주우, 하고……. (〈심청〉에서)
도심지를 조금만 걸어가면 거지들이 우우 몰려드는 것을 유정은 자주 묘사했다. 〈봄과 따라지〉는 바로 거지아이가 행인들에게 구걸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거지, 바 걸, 실직자 등의 사람들을 곧잘 따라지에 비유했다.
1930년대 경제 공황의 여파는 식민지에까지 휘몰아와서 서울은 실직자와 거지의 집결지가 되었다. 이농(離農)의 상경도 서울 인구를 늘렸다. 따라서 유정에게 서울이란 시골의 소작인이나 마찬가지로 가난에 찌들린 생활의 터전으로 인식되었다. 근대화랍시고 건물만 화려하게 들어서는, 가난을 해결해줄 생각은 아예 없었던 시대의 도시 풍경을 유정은 그려준다.
〈따라지〉는 서울에 존재하는 온갖 따라지 인생들이 셋방에 들어서 살아가는 작은 지옥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매일 주인으로부터 방세 독촉을 받는 것은 소작인이 지주에게 도조를 재촉받는 것과 너무나 닮았다.
(6) “저런 자식두! 못두 생겼다. 저게 아마 경성부 고쓰까인 거지?”
“글쎄, 그래도 제법 넥타일 다 잡숫구.”(〈따라지〉에서)
유정의 작품에는 관료들이 안 나온다. 다 따라지 인생들이다. 여기서는 방세를 받겠다고 주인댁에서, 독학으로 부청에까지 출세를 했다는 조카를 불러와 독촉한다. 이를 맞은편 방에서 문 틈으로 내다보고 있던 바 걸들이 주고받는 대화다. 이 대화 속에는 고쓰까이로부터 고관대작에 이르는 식민지 관리들에 대한 불신과 증오심이 스며 있다.
이와 같은 균형 잃은 도시 속에서 그럼 노동자들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유정은 다양한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광부와 양복점 여직공이 등장하여 당시 식민지 시대의 노동자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7) 낮 같은 때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깜빡 졸 적이 있다. 그러다 삐끗하면 엄지손가락을 재봉틀에 박는다. 마는 뺄 수는 없고 그대로 서서 쩔쩔매는 것이다. 그러면 감독은 와서 뒤통수를 딱 때리고, “조니까 그렇지” 하고 눈을 부라린다. (〈생의 반려〉에서)
경무과 분실 양복부에 다니는 여공의 경우를 묘사한 것이다. 이런 작업장에서 여공들은 다 히스테리 환자가 되어 있다. 〈따라지〉에도 경무과 제복공장의 여공이 나오는데 역시 히스테리 환자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왜 하필이면 경무과 제복공장에 다니느냐는 사실이다. 그것은 1930년대 당시 일제가 민족적 차별로 한국인의 산업공장을 적극 억압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공장 중 91퍼센트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것이었고, 약 2퍼센트는 관공서가 운영했다. 반면 한국인 경영 공장은 약 5퍼센트 정도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직공들의 노동시간에까지 그들은 민족적 차별을 두었다. 1930년대 일본에서는 1일 노동시간 8~10시간을 실시한 것이 45.3퍼센트, 10~12시간이 46.3퍼센트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2시간 이상 노동이 46.9퍼센트나 되었다. 따라서 직공들은 작업 중 졸기 일쑤였고 사고가 많았다. 그러나 보상은 일체 없었으며 감독의 손에 목이 달려 있었다. 게다가 임금 역시 일본 노동자의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
유정은 이처럼 농촌의 소작인과 도시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1930년대의 빈민 생활을 즐겨 다루면서도 여성관에서는 서구적인 자유연애론을 구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는 봉건적인 여필종부의 여인상을 제시하고 있어 동시대의 이상(李箱)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유정은 우리의 고전문학에서 골계(滑稽)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어느 설문에서 그는 〈흥부전〉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는데, 사실 그의 묘사법은 〈흥부전〉에 뿌리를 박고 있는 듯하다.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