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이상의 문학은 항거의 문학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반인간(反人間), 반생활, 반예술의 문학이다. 단, 그와 같은 이상 문학의 반인간성, 반생활성, 반예술성(전례적 창작수법을 거부한 실험성)은 바로 인간과 생활과 예술에 대한 그의 한 단계 높은 희구의 결과였다. 그의 부정적 방법은 긍정적 가치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상은 철저할 만큼 의식적인 작가였다. 〈지주회시(會豕)〉에 보이는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도 정밀한 자의식의 메커니즘의 소산이다. 이런 작가가 자신의 반역성의 이면(裏面), 가령 그의 너무나 인간적인 반인간성이라는 자기모순을 모를 리는 없다. 그의 창작활동은 의식적인 자기기만 행위였다. 그래서 〈봉별기(逢別記)〉, 〈종생기(終生記)〉에는 문학을 한 데 대한 회오(悔悟)의 말이 나오곤 한다. 천재의식, 범죄충동, 과대망상증, 삐뚤어진 항거의 자세에 죄의식, 회오, 해학적인 인정이 번번이 섞인다.
이상의 소설은 대충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작가의 현재 생활상과 심상풍경(心象風景)을 다룬 〈봉별기〉, 〈지주회시〉, 〈동해(童骸)〉 같은 작품과 그 현재의 생활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쓰여진 〈날개〉, 〈종생기〉 같은 부류의 작품이다.
이상의 소설에 나오는 두 개의 중요한 문제는 가난 속에서의 돈과 바람 같은 계집(아내)이며,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증오와 반항심을 감춘 경멸, 우롱, 자조(自嘲)다.
먼저 비인간적인 돈의 경우, 가난으로 인한 수모와 이것에 대한 복수가 따르는데, 이 후자가 돈의 인간화 혹은 인정화로 나타나며 그럼으로써 돈에 대한 풍자를 한다. 가령 〈지주회시〉의 주인공은 아내가 A취인소(取引所) 전무한테 받은 모욕적인 위자료의 반을 A취인소 오(吳)의 정부(情婦)인 ‘마유미’에게 팁으로 줌으로써, 혹은 〈날개〉의 아내가 장사(매춘)하는 동안 잠자코 있으라고 주는 욕된 돈을 아내에게 즐거운 장난감으로 되돌려줌으로써 복수하려는 따위다.
다음으로 바람처럼(‘왕복엽서’처럼) 가출하고 돌아오고 또 나가는, 아내에 대한 태도는 복종과 저항의 이중성을 보여 준다. ‘나’는 아내에게 무관심, 무책임하다. ‘나’의 무관심은 아내에게 두들겨맞고도 꼼짝 못하는 기생자(寄生者)의 복종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생활은 아내에게 맡겨 버리고 밤낮없이 잠만 자려고 하는 소극적인 저항으로도 표시된다.〔이불 속에서 뭘 연구한다는 〈날개〉의 그 연구는 이불 속의 저항을 은근히 암시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저항의 근본 원인은 아내가 몸을 판 돈으로 살망정 ‘나’는 “정조는 금제(禁制)가 아니요, 양심이다”(수필 〈19세기식〉)라고 생각할 만큼 엄격한 도덕관념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며, 〈지주회시〉에서 아내가 모욕을 당하자 분해하는 것도 아내에 대한 내밀(內密)한 책임감과 애정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불의는 귀인답고 참 즐겁다” 〈종생기〉
고 하여 간음을 찬양한다. 왜 이런 모순 현상이 생기나? 이상은 생활 무능력자다. 생활비를 벌려고 아내가 외출한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이쪽은 아내의 소행에 짐짓 의심을 품는다. 그렇다고 그걸 표면에 나타낼 순 없다. 차라리 아내를 판 남편, 오쟁이를 진 남편으로 한술 더 떠서 위장해 버릴 뿐 아니라, 아내의 외출을 기화로 이상적·원초적인 순수한 여성을 꿈꾼다. 바람 같은 계집은 소녀로 변한다. 그래서 이상의 여자는 거의 공상적인 관념이다.
나는 가을. 소녀는 해동기(解凍期). 어느제나 이 두 사람이 만나서 즐거운 소꿉장난을 한번 해보리까. 〈종생기〉에서
이상은 이처럼 그의 근본 문제로서의 돈과 여자에 대한 이중적 태도, 그러니까 잔인한 금전에 대한 우롱과 바람 같은 계집에 대한 자조적(自嘲的)인 복종과 저항을 통하여 비인간적인 사물 및 인간관계에 대하여 소극적인 항거를 시도하였다.
지금까지 말한 이상 소설의 주제상의 특질을 기교적 특질과 아울러 주요 작품을 통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예술은 표현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지주회시〉는 증명한다. 예술 작품이란 단순한 형식미 본위가 아니라 내면감정의 어쩔 수 없는 표출이어야 된다. 이 작품의 공간은 밀폐 공간이다. 그것은 방이다. ‘방밖에 없는 방’이다. A취인소의 방안지(方眼紙) 속이요, 이해 관계가 뒤얽힌 현실 세계다.
작중 사건은 간단하다. 어느 날 서울의 R카페에서 A취인소 전무가 여급 ‘나미코’에게 말라깽이라고 놀리자 이쪽이 전무에게 당신은 양돼지 같다고 응수해서 골이 난 전무가 그녀를 층계 아래로 떠밀어 버렸고, 그 사건으로 인하여 관련자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전무가 ‘나미코’에게 위자료를 주어 사건은 해결된다. 그러자 평소 할 일 없이 낮잠을 자거나 인천의 A취인소 조사부의 오(吳)에게 놀러 다니는 주인공은 그 위자료 20원을 들고 R카페로 달려가는데, 그 중 10원으로 술을 먹고, 나머지는 오의 ‘마유미’에게 양돼지라고 부르면서 팁으로 주려는 것이다.
이 작품의 거미는 주인공과 그의 처 ‘나미코’다. 돈은 그 부부의 피를 빠는 거미다. 거미 부부가 서로 흡혈하면서 사는 방 자체가 또한 거미다. 그리고 방은 인간사회이므로 세상 사람은 상호간에 거미다. 단, 주인공 부부의 방은 후툿한 협조의 세계로써 하층사회에 속하며, ‘나미코’가 A취인소 전무에게 떠밀려 층계에서 굴러떨어진 것은 상층사회 인간에게 당한 모욕이다. A취인소는 무명의 자본금이 기업자요, 현물 거래가 아니라 방안지 등속의 정보 자료와 서류로만 거래가 가능한 고도의 자본주의적 영업 방법을 쓰던 곳이다. 그 비인간성은 A취인소 전무의 이름 아닌 ‘전무’라는 말로 상징된다.
“R카페의 쌀쌀한 뚱뚱보 주인도 이름이 없다. 오와 전무가 참석하여 곧 열릴 성탄절 망년 파티의 장소는 R카페의 3층에 있다.”
말라깽이 암거미가 양돼지(전무)를 만나는 세계는 협조가 아니라 경투(競鬪)의 세계다. ‘나미코’의 추락은 A취인소 방안지의 하강선과 같다. 그것은 말하자면 주인공의 나태한 일상의 방에 침입한 무서운 생활과도 같다. 불공평하고 잔인한 인간관계의 타격을 아내의 그 추락이 강조한다. 주인공은 화풀이를 하려고 하지만 상층사회의 인물에게는 못 하고 겨우 애매한 하층의 여자 ‘마유미’에게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 속에 이상의 상징적으로 표현된 매서운 사회의식을 볼 수 있지만, 역시 상징적 수법에 의한 이 작가의 치밀한 조형 감각도 주목해야 된다. 〈지주회시〉의 사건들은 〈봉별기〉의 허담(虛談)이 아니라, 숨통을 조일 듯 내리닫이로 밀집한 단어들로 구성된 답답한 작품 공간에서의 꽤 심각한 생존경쟁에서 빚어진 것들이다. 그 분위기도 ‘하루치씩만 잔뜩 산다’고 할 만큼 절박하다. 또한 그 밀폐된 작품 공간은 각박하고 꿍꿍이속이 많은 생활 공간의 밀폐성과 일치되어 있어 주제와 문체의 긴밀한 상관 관계가 유지된다.
이상은 〈날개〉에서 타처로의 비상(飛翔)에 의해서, 〈종생기〉에서는 죽음, 혹은 자신의 생매장에 의하여 현재의 궁지를 벗어나고자 한다. 그 비상의 상징적·현실적 목적지는 이상이 입버릇처럼 가고 싶다고 한 도쿄〔東京〕로 일단 간주할 수 있는데, 〈종생기〉는 편지에서 말한 ‘구역질이 날’ 도쿄에 대한 환멸까지가 그의 곤궁한 생활에 겹쳐서 쓰여진 절망적인 작품이다.
〈날개〉의 주인공은 커다란 아이다. 삶의 무의미성에 대해 쓰려고 할 때 이상이 취하는 시점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의 그것이다. 물론 위장이다. 그 결과 〈날개〉의 기묘한 복합적 정신 태도가 나온다. 아이는 아이니까 장난을 잘 하며, 장난감은 아내의 화장품과 휴지, 저금통, 심지어 돈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그가 장난하는 것들이 속해 있는 세계에 대해 염증(厭症)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비판적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이며, 그의 권태와 낮잠도 현실에 대한 불만의 결과이다.(모차르트, 맬더스, 마르크스를 기억하는 아이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아희적(兒戱的)인 장난과 염증의 원인은 아내와 돈이다. 그는 아내에 대해 무관심이요, 이야기도 않지만 그녀를 무서워한다. 아내는 곧 생활이기 때문이다. 또한 돈으로 말하면 아내가 주는 용돈은 상거래의 돈과 같지만, 아이는 돈의 세속적인 의미와 용법을 모르며, 그가 거리의 행인에게 돈을 주려고 하고 당연한 일로 그게 안 되니까 아내에게 몰래 그 돈을 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소박한 그리움 때문이다. 아내는 그 돈을 자그만 횡재로 여기고 기뻐한다. 그처럼 돈의 인간화를 위한 노력이 결국 세속적·상업적 가치로 떨어지고 마는 얄궂은 사건을 통하여 비인간적인 돈과 인간적인 돈의 가치가 우습게 대조된다.
〈날개〉에는 생활에 대한 공포와 은근히 비판적인 염기(厭 氣)를 깊숙이 감추고 있다. 그것을 아희적인 아이러니로 은폐하려고 하지만, 생활은 끝끝내 쫓아온다. 아달린 사건이 그것이다. 아내는 감기약이라고 속이고 그 수면제를 먹임으로써 ‘나’를 서서히 죽여 장사의 방해물을 없애려고 했을지 모른다. 그처럼 손발이 안 맞는 아내에 대한 공포증 때문에 일본인 백화점 옥상에서 ‘나’는 이 세상을 훨훨 벗어날 수 있는 날개를 원하는데, 그런 원망(願望)은 어쩔 수 없이 의식적으로 퇴화된 아이의 원망이어서 매우 절실한 느낌을 준다.
이상의 모든 작품에는 구차한 변명이나 집요한 원한, 증오, 질투, 시기 같은 감정적 요소가 없다. 저 선량성 때문이리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이가 되어 자신을 우롱한다. 그럼으로써 잔혹한 인간 관계를 우롱해 준다. 단, 자조적인 우롱도 대담하게 멀쩡하고 감쪽같은 말로 표현되면 본격적인 풍자 소설의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이상의 그 우롱은 유약해서 그렇지 못하다.
〈날개〉의 아이에는 늘 한구석 서글플 만큼 섬세한 자의식이라는 허점이 따른다. 우리는 그 허점에 동정하고, 그 허점을 메우기 위한 포즈〔〈종생기〉의 말로는 ‘비신술’〕에 동정의 웃음을 보낸다.
〈종생기〉는 이상적인 포즈 문학의 마지막 본보기다. 그러나 그 포즈는 〈날개〉의 조심스러운 자기 방어를 위한 포즈와는 달리 주로 부질없는 대언장어(大言壯語)의 포즈여서 불쾌감을 준다. 〈종생기〉는 기발하되 너절한 태작(太作)이다.
여기에는 이상의 가출한 아내와 정희(貞姬)라는 애인이 나오지만 그들의 불의의 방법이 같으므로 그 두 여자를 동일시해도 된다. 나로서 주로 관심이 쏠린 것은 이상의 소설에 잘 나오는 정희 같은 여자를 중심으로 한 사건보다도 그 분량이 훨씬 많은 작자의 푸념의 내용이다.
첫째 ‘빈민굴’, ‘독화(毒花)’, ‘허망한 아궁이’에 문학을 비유하고, 그런 문학을 한 결과로 치욕감과 죄의식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종생기〉를 써놓는다는 것, 다음으로는 근대적 건물에서 먼저 철근 철골과 시멘트와 세사(細砂)부터 보이는 숙명적인 투시벽(透視癖)과 그로 인한 여러 가지 기상(奇想),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와 고리키의 문학에 대한 비난이 나오는데, 그 작가들의 사상적 내용이 아니라 소설 기교에만 주목하여 미문(美文)을 쓸 듯 쓸 듯하다가, 알 속을 보여줄 듯하다가 마는 그들의 구렁이 같은 사기술을 그 비난의 이유로 든다(그런 견해는 물론 피상적이다). 이처럼 치욕적인 문학, 투시벽, 러시아의 의뭉스러운 작가 등에 대한 푸념을 하면서 자기 자랑으로 그의 ‘박빙(薄氷)을 밟는 듯한 포즈’와 ‘세기적인 지혜의 소유자’- 천재의 ‘통생(通生)의 대작’이 〈종생기〉요, 그 작품을 끝으로 이상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친다고 한다.
이상의 의도는 결국 종생(終生)에 있다. 세상을 경영할 줄 몰랐던 바보인 자신의 종생이다. 러시아 작가의 사기술은 투기벽 때문에 쓰지 못한 작가의 종생이다. 아내를 팔고 문학으로 망신한 스물여섯 살의 노옹(老翁) 이상의 종생이다.
단, 이상은 늘 그래왔듯이 〈종생기〉에서도 한 가지 지킬 것은 지켰다. 그것은 자조다. 타인을, 세상을 경멸하고 우롱하기 전에 비록 작가에게 바람직한 자아 실현의 비전은 없었을망정 자기부터 경멸하고 우롱했다. 그는 유한(遺恨)을 싫어한다. 구구한 변명이 없다. 세상이 싫으면 자버린다. 아내가 무서우면 이불 속으로 숨어 버린다. 끝판에는 자신을 생매장한다. 이상은 순결하다.
누구 못지않게 삶의 질서와 내면적 조화를 희구하여 번번이 실패한 이상은 자폐증(自閉症)이 심해졌고, 소극적인 항거로써 반인간, 반생활, 반예술의 작품을 써야만 했다.
- 이보영(李甫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