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계급(사무라이)의 대두와 함께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쥐었던 인물
일본의 역사를 돌아보면 중세와 근세는 무사들의 시대였다. 교토에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조정)가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정치를 행한 것은 쇼군을 중심으로 무사들이 세운 무가정권(막부)이었다.
그러한 무가정권을 공고히 하여 약 700년에 걸친 무가정권을 이어갈 수 있게 한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였으나, 무가정권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은 다이라노 기요모리였다.
애초에 무사들은 귀족의 호위(사부라이, 侍)를 맡거나 지방의 장원을 경비(쓰와모노, 兵)하는 정도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실력을 키워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실권을 쥐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 다이라(平) 집안과, 미나모토(源) 집안이었다. 중앙정부의 귀족들은 이때 이미 부패하여 자신들의 힘으로는 지방에서의 봉기는 물론 중앙에서의 세력 다툼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해져 있었다. 이에 결국은 무사들의 힘을 빌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무사들의 세력을 키우는 가장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무사들의 시대가 도래하자 두 집안(겐페이)은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는데 이 다툼에서 최초 승리를 거둔 것이 헤이케(다이라 집안)였으며, 그 무사집단의 우두머리(동량)가 바로 다이라노 기요모리였다. 정적을 제거한 기요모리는 곧 자신의 세력을 더욱 키워 결국에는 무가정권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요모리의 너무나도 빠른 출세와 전횡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질투를 사게 되었고 결국에는 미나모토 씨의 반격을 받아 두 집안의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기요모리는 겐지(미나모토 씨)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헤이케의 멸망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의 죽음이 헤이케의 멸망을 재촉한 것이리라.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대한 전기 대부분이 겐지의 전성기에 쓰인 것이기에 그에 대한 평은 별로 좋지 않았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방면에 뛰어난 걸물로 일본에서 최초로 무가정권을 시작하였으며, 중국 송나라와의 활발한 무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했고, 당시 커다란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던 사원의 세력과 당당히 맞서 자신의 뜻대로 그들을 움직였으며, 문화 · 예술 방면에서도 활약했다.
우리에게는 이름 정도만 알려져 있는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서 그의 일생을 살펴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