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는 1809년 미국 보스턴에서 가난한 배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이 채 되기 전에 양친을 잃고, 거리에서 헤매게 된 포는 존 앨런(John Allan)이라는 연초 수출상의 양자가 되어, 리치먼드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1815년, 양부(養父)를 따라 도영(渡英), 런던에서 5년간 교육을 받고, 1820년 리치먼드로 돌아와 1826년,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우등생이었으나 도박에 손을 대어 1년도 못 되는 동안에 2,500달러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에 격노한 양부는 그를 퇴학시키고 자기의 상점에서 일을 보게 했다. 그 후 그는 집에서 도망하여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젊어서 배운 술과 도박의 악벽(惡癖)으로 말미암아 공을 이루지 못하고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양부와도 의절(義絶)하였다. 그렇게 되자 호구지책이 곤란하였으며, 그가 문필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는 1827년, 1829년, 1831년에 시집을 발표했다. 소설은 25세 되던 1833년에 볼티모어의 문예지에서 주최한 현상 모집에 당선된 처녀작 〈병 속의 원고(Ms. Found in a Bottle)〉를 효시(嚆矢)로 한다. 그 후 184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74편의 단편만을 발표했을 뿐, 그는 장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1836년 그의 친사촌 누이동생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는데, 그때 클렘의 나이는 겨우 13세였다. 그 후에도 그의 나쁜 버릇은 여전히 그를 떠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는 그가 얻은 모든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되었다.
1847년 그의 아내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부터 그의 절망은 더할 나위 없이 컸었다. 어린 그의 아내의 임종시에는 장모와 자신만이 그녀를 간호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누워 있는 클렘의 몸 위에는 다 떨어진 포의 외투와 한 마리의 고양이가 놓여 있었을 뿐, 이불 한 채 없었다는 것이다. 그 후 그는 경제적으로 빈곤했을 뿐 아니라 작가 생활에서도 기아 상태에서 헤매게 되었다. 그러자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아편에 탐닉하기 시작하였다.
1845년 발표한 빼어난 시 〈큰 까마귀(The Raven)〉는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했지만, 보수는 겨우 1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1849년 10월 7일, 볼티모어의 어느 주점에서 과음으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져 그곳 공립병원으로 옮겨졌으나 40세를 일기로 인생의 막을 내렸다.
술과 빈곤과 고독과 실연이 포의 일생의 반려였다.
“나의 생활은 되는 대로 사는 것 - 충동, 정열, 고독에의 동경 - 장래에 대한 열망 속에 나타난 모든 것을 경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자서전에서 그가 쓴 한 구절이다.
이상이 포의 외면적인 경력의 큰 요지다.
1820년부터 35년에 걸친 미국 문단의 주조는 국민 일반의 현세적, 낙관적인 생활태도를 반영하여 현실 순응의 소극적 태도를 취하고 정치상의 시사 문제를 중대 관심사로 하여, 작가들은 독자에게 위안과 교훈을 주는 것을 문학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포와 동시대의 작가들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일종의 아메리카니즘을 발양(發揚)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포는 이들 동시대 작가들의 저속한 취미로 말미암아 예술이 사회 상식에 봉사하고, 기성 도덕의 준승(準繩)으로 해서 꼼짝도 못하게 묶여 있는 것에 반발을 느끼고, 예술가의 정신은 세속적 인습의 세계를 이탈하여야 되고 그의 시야는 선악을 초월한 저쪽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그의 가슴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이제까지 걸어온 무궤도의 생활과 경제적 무능력, 그 자신의 비속한 도의관(道義觀)에 반발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의 기치를 높이 들려는 욕구가 그의 마음속에 싹튼 것이다. 이러한 예술관은 인생에서 패배를 맛본 실생활의 패잔자(敗殘者)로서의 깊은 자각에서 나온 자기 분석 끝에 저절로 생긴 것일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예술이 지향하는 바는 전혀 인간적 요소를 빼놓은 특이한 지적·추상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독특한 암시적 수법으로, 시대에 관계없이 사회 내지 자신을 솔직히 묘사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완전히 코스모폴리탄적인 작가였다.
그의 예술관을 자세히 평하는 것이 이 작은 단편집의 본의가 아니므로,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평론, 〈시의 원 리〉 〈시문(詩文) 구성론〉 〈호손론〉 등 3편의 요지만을 종합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그는 〈시의 원리〉와 〈시문 구성론〉에서는 시를, 〈호손론〉에서는 소설을 논하고 있다.
1. 시의 목적은 인간 정신의 깊은 심연(深淵)에 잠겨 있는 심미감에 만족을 주는 것이고, 이러한 만족감은 도덕 혹은 진리 탐구가 주는 그것과는 엄밀히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2. 이러한 인간의 최상의 감정인 심미적 만족감은 ‘미’를 명상하는 인간 최상의 상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3. 이러한 인간의 상상은 한두 시간 이상 계속됨이 없으니 모든 작품은 한두 시간 내에 집필되고 한두 시간 내에 읽혀질 수 있는 작품이라야 한다. 시는 단시, 소설은 단편이라야만 한다.
4. 모든 예술 작품의 요건은 ‘인상의 통일’과 ‘효과의 전체성’을 지상(至上)으로 삼아야 되고, ‘우울’과 ‘공포’만이 영(靈)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구성 요건이다.
5. 소설은 속세의 관찰과 인간의 심정을, 즉 공포·우울·비애와 같은 정조(情調)를 산출하는 현실적 생활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지상적(至上的) 요소인 그러한 감정 그 자체를 작가가 인공적으로 예정한 예술적 효과를 중심으로 해서 묘사해야 한다.
이것이 그의 시론 및 소설론의 골자다. 물론 효과의 전체성을 지상으로 한 그의 작품은 개성의 묘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시대의 조류에 몰간섭(沒干涉)했다는, 작가로서의 큰 결함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세계 수준에 비추어보아 저조했던 미국 문단에 이와 같은 귀재가 나타나 기괴와 신비, 환상으로 가득 찬 상상의 세계를 전개시켰고, 단편소설의 장르를 창조· 완성시켰으며 근대 탐정소설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에서, 미국 작가로서 오늘날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처럼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는 없다. 적어도 프랑스 문단에 있어서 그만큼 영향을 준 영미의 작가는 셰익스피어, 바이런을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단편소설의 창조자로서의 공적만이 아니라, 작품 내용의 가치로 봐서도 그의 이름은 세계 문학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보들레르가,
“포에겐 견딜 수 없는 일대 감옥이었다” 라고 표현한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 원고를 팔아 겨우 기아를 면한 포, 그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속세의 진구렁 속에서, 환락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세의 고뇌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술을 마시며 시대의 최저하(最低下)에 무의식적으로 침잠(沈潛)하면서도 미를 창조해냈다. 미를 창조한 인간을 천재라 한다면 그 역시 천재라 할 수 있겠다.
74편에 달하는 그의 작품은 그 내용으로 보아 공포적 효과와 추리적 효과를 나타내는 작품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작품이 전자에 속하고, 후자에 속하는 작품은 겨우 4편에 불과하다.
본 선집에서는 그의 작품의 색다른 경향을 알 수 있는 8편의 작품 - 전자에 속하는 작품 6편, 후자에 속하는 작품 2편을 선택했다. 작품의 배열은 작품 발표 연대순이 아니라, 읽기 좋은 소책자를 만들기 위해서 역자 임의대로 배열했으며, 초기작에서부터 만년작에 이르기까지 골라보았다. 역자가 대본(臺本)으로 사용한 원본은 《The Complete Tales and Poems of Edgar Allan Poe》 (The Modern Library, Random House)이며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한 《Poe"s Best Tales》를 참조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필요한 곳은 괄호 속에 작은 글씨로 역주를 넣었다. - 옮 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