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상처이고 옹이였던 이 사건들은 숱한 이들의 한숨과 눈물, 흐느낌과 절규, 피와 목숨을 내어준 덕에 자랑스러운 역사로 아물었지만, 온몸을 던졌던 사람들은 온갖 풍상 속에서 조금씩 사라졌고 잊혔다. 이름은 기록돼 있어도 서너 줄의 똑같은 약력으로 남은 사람들, 이름도 불리지 않고 기억되지도 않는 사람들, 이름도 짐작할 수 없이 허공 속에서 맴도는 사람들…. 우리 역사는 이름마저 잊힌 사람들이 끌어온 상처의 결과다.
「이름을 부르는 시간」의 다섯 작품은 우리가 지금 당장 그들의 이름을 찾아 크게 외쳐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려준다. 이름을 부를 때 마음이 닿는다. 죽창을 쥔 동학농민군의 억센 주먹을 내 손으로 감쌀 때, 3ㆍ1만세운동에 선 이들과 두 손 번쩍 들고 외침을 함께할 때, 죄 없이 잡혀간 동무를 구하기 위해 달려 나가는 옥구 소작농들과 걸음을 맞출 때, 우리말과 우리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초를 당한 학자들의 상처를 닦아줄 때,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와 평화를 외치며 쓰러진 이들의 어깨를 겯고 함께 일어설 때, 두렵지만 기필코 나서야만 했을 이들의 절박함에 공감하게 된다. 하염없이 첩첩했을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 막막함 속에서도 당당했을 그들의 눈빛을 마주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소리 내 부르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들꽃상여」에는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싸우다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간 동학농민혁명의 넋들이 있다. 자신의 집을 자치 행정기관인 집강소로 내놓은 김제 원평의 동록개와 여성 장군 이소사, 소년장사 이복룡, 판소리창우부대의 또랑광대 소리쇠 등이다. 「들꽃상여」는 2021년 봄, 극단 까치동이 초연했으며, ㈔한국극작가협회의 ‘2021한국희곡명작선’과 전주문화재단의 ‘미디어북 콘텐츠 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됐다. 2022년 오디오북으로 제작돼 대한민국 전자출판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거두리로다」는 자비로운 선행과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전주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걸인 성자 이보한(1872∼1931)의 삶을 다룬다. 특히, 1919년 3ㆍ1운동을 전후로 서울과 전주에서 활동한 행적을 중심에 둔다. 일제강점기 전주, 들풀 같으면서도 동구 밖 정자나무처럼 버티고 서 있던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2023년 가을, 극단 까치동이 무대에 올렸다.
「1927 옥구 사람들」은 군산ㆍ옥구의 열혈 청년 장태성(1909∼1987)과 일제강점기 우리 농민의 대표적인 저항운동으로 꼽히는 옥구농민항일항쟁을 다뤘다. 이 항쟁은 농민과 청년 5백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름이 드러난 사람은 재판 기록이 남은 34명이 전부다. 이들은 10대 3명, 20대 16명, 30대 12명, 40대 3명으로 평균 나이는 29세였다. 옥구농민항일항쟁은 불의에 비분강개한 청년들의 투쟁이며, 작은 혁명이다.
시조 시인 가람 이병기(1891∼1968)의 생가를 배경으로 한 「수우재에서」는 「조선어 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조선어학회를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몰아 관계자들을 체포ㆍ투옥했던 조선어학회사건이 소재다. 가람이 일본 경찰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는 내용이지만, 그 속에서 가람을 상징하는 일기, 조선어학회, 우리말 강의, 창씨개명, 난초 등을 소재로 그의 자취를 좇고, 민족의 말과 글을 보존하는 데 노력했던 그의 강인한 의지를 살핀다. 이 작품은 2012년 수우재에서 상설 공연된 악극 〈백세지사(百世之師), 가람 이병기〉를 다시 쓴 것이다.
「아! 다시 살아…」는 5ㆍ18민주화운동의 첫 번째 희생자인 전북대학교 학생 이세종(1959∼1980)과 1980년 5월 17일ㆍ18일 전주의 처절한 밤을 담았다. 2007년 이세종 열사와 전북의 5ㆍ18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문화제에서 올린 추모 영상극의 대본을 수정했다. 작가는 “희곡의 인물과 언어는 실체를 명확하게 담지 못하고 겉핥기에 불과하지만, 경험자들이 말하는 진실 혹은 사실만이라도 들려주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불안한 출발이지만, 이러한 시도를 시작으로 훗날 더 깊고 너른 내공을 가진 작가가 적확한 서사로 작품을 다시 쓸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