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이 작품은 세계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연애소설이라고 일컬어진다.
괴테(1749~1832)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바이마르에서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여성들과 교유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폭발적인 연정들을 시화하였다. 괴테는 항상 사랑의 동경과 자유의 충동에서 연애를 하였고, 그 사랑이 시를 쓰는 행위로 직결되었으며, 사랑하는 여성에게서 시신詩神을, 시의 원천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한 여성에게만 얽매인다는 것은 시인으로서는 마치 포로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즉 사랑의 대상을 변경함으로써 시재詩材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랑의 대상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시작詩作으로 연결되었다. 만약 괴테의 사랑이 관능적인 사랑이었다면 그는 시성詩聖이 아니라 카사노바와 동계열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괴테가 사랑한 여인상은 순박한 시의 소재가 되고 괴테의 내면에 시적 감흥을 솟구치게 하는 원동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원문은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라고 되어 있어서 ‘슬픔’이라기보다는 ‘고민’ 또는 ‘번뇌’라고 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이라 하겠으나, 한국에서는 흔히 ‘슬픔’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평소에 듣던 명칭과 달라서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역자도 관례에 따라서 ‘슬픔’이라고 번역하였다. 또한 문법상으로는 〈des jungen Werthers〉가 틀리다고 해서 괴테는 독일어 문법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항간에 떠돌기는 하나, 여하튼 간에 괴테가 썼으므로 설사 그것이 현대 또는 당시의 독일 문법에 맞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괴테 문법이며, 따라서 하나의 전례가 되었고, 본인이나 기타 아무도 정정하지 않은 채 영원히 전해지는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당시의 반향은 대단하였다. 청년들은 파란색 상의와 노란색 바지에 조끼 차림의 베르테르 복장을 하고 다녔다. 처녀들은 롯데와 같은 사랑을 받기를 원했고, 젊은 부인들은 남편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이혼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종교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생각했던 자살사건이 속출하였다. 이런 사태에 대한 사회적 비난도 심각하였다. 즉 많은 청년들이 베르테르를 칭찬하고 괴테를 거의 신격화한데 반하여 노년층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비판의 소리가 드높았다. 특히 레싱 같은 독일 제일의 문예 평론가조차도 찬사를 보내지 않았다. 예술작품으로서보다는 이 작품이 끼치는 영향 때문에 반대했으리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도 결국 베르테르 앞에서는 전혀 무력한 것이어서 비단 독일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급속도로 이 가장 독일적인 소설이 애독되었고, 나폴레옹이 일곱 번이나 읽었으며 이집트 원정 중에도 진중문고에 간직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괴테를 대면하여 “여기 한 사나이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자기와 동등한 천재의 존재를 인정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책은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이어져 꾸준히 읽혀지고 있다. -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