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노크, 어쩌면 의학의 승리〉는 1923년 12월 파리 첫 상연 이후 세계 곳곳의 무대에 올려졌는데 어느 나라에서 상연되었는지를 묻기보다 어느 나라에서 상연되지 않았는지를 묻는 쪽이 낫다는 말이 돌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100년 동안 꾸준히 연극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것은 물론 2017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영화화된 이 작품은 프랑스 중고등학교의 교재 및 추천 도서로 학부모들의 좋은 평가가 이어지고 있으며 2022년 코로나 시기 이후 의사와 환자를 풍자적으로 다룬 이야기라는 점에서 새로이 주목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23년 7월 프랑스의 아비뇽 연극축제에서도 한 달 내내 소개된 바 있다.
“모든 사람은 잠재적 환자다.”
개개인을 선동할 수 있는 사회, 현대 의학의 승리?
1막 무대는 시골길 위의 낡은 차 안. 전임 의사 부부와 크노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크노크는 권리금을 분할해서 지불하는 조건으로 닥터 파르팔레를 이어 생모리스에 새로 부임하는 의사다. 크노크는 거래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지만 이내 곧, 이렇다 할 연구 논문 하나 없이도 이미 성공적으로 의학을 실천할 수 있었다고 밝히며 앞으로 더 큰 부자가 될 것이라 공표한다. 주인공 크노크는 이른바 돌팔이 의사. 돈을 벌기 위해 순진한 마을 사람들을 겁주며 개개인을 의학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심산이다.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학교 선생님과 약사를 설득하는 데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크노크의 목적은 개개인을 선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청중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그들의 뼛속까지 스며드는 효과입니다. 선생님도 차츰 익숙해지실 겁니다. 사람들은 이제 발 뻗고 잠들지 못할 겁니다! (베르나르에게로 몸을 기울이면서) 질병이라는 벼락을 맞고서야 깨어나는 식으로, 안전 감각을 완전히 망각한 채 잠드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과오거든요. (p. 67)
평화로운 마을이 의학에 몰두하는 전체주의 사회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은 개개인을 선동하는 인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생활을 누려왔던 사람들이 그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그들의 자아를 정복할 줄 아는 인물과 대면하자마자 자기 조절 능력을 잃고 만다. 쥘 로맹은 그렇게 마을 사람 모두를 환자로 만들어 고객을 유치하는 의사 크노크를 통해 허울뿐인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는 개개인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 결과 나약하고 쉽게 조정당하는 인간에 대한 비극적인 그림이 탄생했다. 크노크의 환자 중 하나인 어느 몰락한 귀족 부인의 대사에서도 드러나듯(“인간의 본성이란 참 보잘것없는 것 같아요. 더 힘든 일이 생겨야 이런 일이 별것 아니게 되니 말입니다.” [p. 89]) 쥘 로맹은 현대성에 비관적 시선을 던진다. 인간 해방과 동떨어지게 현대성은 위험천만한 술수와 허위의 기술로 유혹해 인간을 노예로 만들 위험이 있음을 경고한다.
의학 숭배, 정신과 육체를 조정하는 전체주의
쥘 로맹은 현대 과학이 종교를 대체한다고 자부하며 의학이 제사장이나 심지어 신을 대신한다고 말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중요한 지식의 소유자로 간주되는 의사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이며 경외심을 품는다. (“저를 속이지는 마세요, 의사 선생님. 저는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p. 93]) 그런가 하면 크노크는 의학을 숭배 차원으로 승격시키고 ‘의학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의학 자체가 종교이며 그것만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서 건강한 사람들에 대한 역설적 증오를 나타낸다.
그냥 별다른 생각이 없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선생님이 제게 넘기셨지요. 제 역할은 그들에게 의료적인 생각을 심어가면서 의료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들을 침대로 이끌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는 겁니다. 결핵, 과민증세, 동맥경화, 뭐든 좋은데, 아이고 맙소사! 아무 이상 없이 멀쩡한 사람, 건강한 사람은 도저히 그냥 잠잠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지요. (p. 127)
의학의 승리를 통해 크노크는 스스로를 존경해마지 않는다. 자신이 부임한 생모리스 마을 전체가 의료적 분위기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스스로를 창조주라고까지 일컫는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잠재적 환자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육체에 대한 어떠한 진단이든 정당화한다. (“저는 이론도 경험도 풍부해서 첫 보균자를 의심해볼 권리는 충분히 있으니.” [p. 68]) 또한 근대 프랑스 의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생리학자로 꼽히는 클로드 베르나르를 언급하며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도 자신이 모르는 병을 앓고 있다.”(p. 29)라고 말한다. 결국 크노크는 사람들의 정신까지 통제하고 마을 전체를 의학, 아니 오히려 질병에 전념하는 거대한 병원으로 탈바꿈시킨다. 크노크는 끊임없이 힘과 통제에 매료되고, 이제 닥터 파르팔레마저 그의 논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 250개의 방에서 사람들이 제각기 의학에 고백을 하는 거지요. 250개의 침대, 그 침대에 드러누워 이제야 삶의 의미를,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제 덕분에 이제야 의료적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말이지요. 밤이 되면 그들 모두 불까지 밝히니 더욱 아름답지요. 그 조명 하나하나, 거의 모든 등불이 제 것이니까요.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칠흑 속에서 잠드는 거지요. 그들은 삭제되는 겁니다. 대신 환자들은 작은 등불이나 램프라도 켜놓지요. 의술이 닿지 않는 모든 것을 저렇듯 밤의 어둠이 감추어버리는 거지요. 동시에 저를 부추기며 한번 해보겠는지 도전장을 던집니다. 말하자면 이 지역은 제가 계속해서 창조해가는, 제가 창조주인 일종의 창공이라고 할까요. (p. 130-131)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언어의 연금술사, 쥘 로맹의 화려한 언변과 유머
프티부르주아 출신인 쥘 로맹은 문학과 철학, 의학 분야에서 뛰어났으며 젊은 시절부터 시와 소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쥘 로맹이 초창기 성공을 이룬 것은 연극 무대에서였는데 1차 세계대전 이후 쓰여 무대에 올려진 〈크노크〉는 프랑스 사회가 근대성에 직면해 겪은 격변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1923년 상연 당시 사회에 크나큰 반향을 일으켰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회를 조직하고 개개인을 지휘하는 돌팔이 의사 크노크는 언변과 과학의 조작력을 이용하여 마을 사람들을 전체주의적 의학 개념에 복종시킨다. 그렇게 쥘 로맹은 작품을 통해 해방과 동시에 소외의 근원이기도 한 근대성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크노크의 언어는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히 기교가 넘친다. 의학 용어를 동원하고 의사처럼 말하지만 의료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처방을 내리는 모습이 청중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무지한 마을 사람들은 돌팔이 의사의 가면을 벗기기는커녕 매료되고 조정당한다.
크노크: (청진기로 여인을 진찰해보면서) 머리를 숙여보세요. 숨을 들이쉬세요. 기침을 해보세요. 어릴 때 사다리에서 떨어진 적 없습니까?
여인: 그런 기억 없는데…….
크노크: (손으로 짚어보고, 등을 두드려보고, 갑자기 신장 쪽을 눌러보기도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꽤 높은 사다리였을 겁니다.
여인: 어쩌면 그랬을 수도. (중략)
크노크: [……] 그러니까 옛날에 사다리에서 떨어질 때 거꾸로 떨어지는 바람에 흉추골이 반대 방향인 상태로 미끄러진 거지요. (그 방향을 화살표로 그려 보인다) 소수점 이하 밀리미터니 별거 아니라고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대단한 숫자는 아니지요. 그런데 문제는 잘못 연결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방팔방으로 계속 욱신거리는 거고요. (p. 79-82)
위험한 이데올로기와 풍자적 코미디의 공존
돌팔이 의사는 연극에서만큼은 승리하지만 현실에선 결국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 보인다. 쥘 로맹은 크노크를 가리켜 ‘중노동자’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진료실로 탈바꿈한 호텔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레미 부인의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그야말로 중노동의 삶을 살고 계시죠. 기상하자마자 진료 방문하러 온종일 뛰어다니시니까.” [p. 113]) 또한 그는 자신이 축적한 부를 즐기지 못하는 듯하고 오히려 반대로 의학에 복종하는 노예 같다. (“명심해두시오. 내가 무엇보다도 바라는 건 사람들이 치료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돈을 바랐다면 파리나 뉴욕으로 갔지 여기서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p. 55]) 그리고 연극이 끝날 무렵 크노크는 고백한다.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진단을 하려 들어서 스스로 거울을 보는 것조차 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결국 현대의학의 이데올로기는 자율적으로 행동하여 의학을 실천하는 사람들까지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덫에 빠뜨릴 수 있는 현대성의 위험을 고발한 것이다.
어쩌겠습니까! 누군가를 마주 대하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리는데. 진단이 술술 나와 쭉 나열되는 걸 저 자신도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답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장소에서도 말입니다. (신중하게) 그렇다 보니 얼마 전부터는 아예 거울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p. 143)
단순한 줄거리의 짧은 3막극으로 구성된 이 의학 풍자극은 돌팔이 의사로 인해 자신들이 환자라고 설득당하는 시골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희화화해 일찍이 몰리에르의 희곡 「상상병 환자」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라 평가받아왔다. 조연들은 단순하고 어리숙하며 얼마든지 예측 가능하고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 같다.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두 명의 사내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마치 팬터마임을 보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한다. 언어유희에 기초한 코믹한 단어도(“간지럽히는 것 같소, 슬슬 긁는 것 같소?” [p. 57]) 크노크가 사용하는 의학 신조어에 의해 그 의미가 무산되면서 상황은 심각해진다. 작품 말미 크노크와 닥터 파르팔레의 대화에서 조롱 섞인 풍자와 세련된 언어가 공존하며 극은 절정에 달하고 종교, 전쟁, 의학을 접목한 어휘를 동원하여 크노크는 교묘한 반박으로 파르팔레에게 압력을 가한다. 크노크는 우스꽝스러운 사기꾼이자 뛰어난 웅변가인 동시에 양면성과 모순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등장인물]
크노크(주인공. 닥터 파르팔레를 이어 생모리스에 새로 부임하는 의사)/
닥터 파르팔레/ 파르팔레 부인/ 장(운전사)/ 북치기/ 베르나르(교사)/ 무스케(약사)/
검은색 복장의 여인/ 보라색 복장의 여인/ 사내 1/ 사내 2/ 레미 부인(클레 호텔 주인)/
시피옹/ 하녀/ 무대 뒤에서 들려오는 마리에트(크노크의 비서)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