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막을 기회 있었다”
오늘의 한국 경제와 사회를 만든 역사적 사건의 이면
각 정부의 경제 정책 비화 몇 가지를 더 살펴보자.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정부의 정책도 투명해지고 국회와 언론 등의 견제와 감시 아래 집행되지만, 김영삼 정부까지만 하더라도 첩보작전을 연상케 하는 비밀 정책 추진이 잦았다. 대표적인 것이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 비밀리에 추진되었던 토지개혁 작업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에 골머리를 앓던 박정희 정부는 경제기획원 내에 비밀 태스크포스를 꾸려 이승만 대통령에 이은 ‘제2의 토지개혁’ 안을 준비했다. 일정 기준을 초과하는 땅을 모두 국가가 강제 수용하여 전국 세대별로 공평하게 재분배하겠다는 이 급진적인 토지개혁 안은 최종 단계에서 현실에 옮기지 못하고 1978년 ‘8.8 부동산 조치’로 대체되었다. 한국 사회의 고질인 부동산 문제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질 뻔했던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1980년 전두환 정부 초기에 전역한 직업군인에게 각종 특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군부의 지지를 받기 위해 헌법이 금지한 사실상의 특수계급을 만들려는 시도였다. 당시 사무관 신분이었던 저자를 비롯해 경제기획원 관료들이 반대하자 권총을 찬 현역 중장이 찾아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고 회고록은 전한다.
그때 자리를 그만둘 걸 각오하고 법안 처리를 막는 데 애썼던 사람들이 기억난다. 경제기획원의 이진설 경제기획국장과 이석채 기획4과장, 청와대의 김유후 법무비서관이다. 특히 이 국장은 권총을 찬 군인의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 줬다. -181쪽
19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이 단행한 금융실명제는 철통 보안 속에 전격 추진된 것으로 유명하다. 책에 밝힌 자세한 증언은 세간에 알려진 이상이다. 당시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이었던 저자는 대통령에게 보고할 예산안 작업을 담당했는데, 보고일 당일 막상 언론에 발표된 것은 예산안이 아니라 금융실명제 긴급명령이었다. 발표를 감추기 위해 예산보고를 빙자한 연막작전까지 펼친 것이었다. 보고서 작성자는 물론 청와대 경제수석조차 몰랐던 비밀 작전이었다. 정보가 누설될 경우 예상되는 기득권의 저항을 그만큼 우려했던 것이다.
사실 금융실명제를 추진한 건 김 대통령이 처음이 아니었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에선 진작부터 금융실명제를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2년 7월에는 금융실명제 추진 방안을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강경식 재무장관과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 대통령 결재를 받아 금융실명제 도입에 나섰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벽에 부딪혀 실패했다. 우여곡절 끝에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는 했지만 부칙으로 시행 시기를 무기한 연기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노태우 대통령도 1987년 대선에서 금융실명제 실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김영삼, 김종필 총재와 손잡은 3당 합당 이후 흐지부지됐다. 김영삼 대통령이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한 데는 그런 실패의 경험이 교훈이 됐을 것이다. -211쪽
이 밖에도 6공 황태자라 불리던 ‘박철언 예산’ 관련 에피소드, 1997년 외환위기 시 경제 사령탑과 조직 구조의 문제, 무산된 행정수도 이전과 세종시 건설, 긴박했던 한미 FTA 협상 과정, 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 깊숙한 영향을 미친 주요 정책의 배경과 이면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한다.
“국민을 위한 재정이 필요합니다”
개혁적 대통령과 정통 경제 관료의 운명적 만남
5개 장으로 구성된 회고록에서는 1장부터 3장까지를 노무현 정부의 ‘재정 개혁’, ‘경제 정책’, ‘안보·사회 정책’에 할애하고 있다. 이전 역대 정부의 정책 비화는 4장에서 다룬다. 노무현 정부 비중이 높은 것은 저자의 경력에 기인하지만, 노무현 정부 경제 운용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바로잡고 싶은 강한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이념보다는 실용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시장경제 원칙에 충실했다.
노무현 정부는 인위적 경기 부양을 하지 않았다. 그게 경제를 망친 것처럼 낙인이 찍혀 있다. 나는 지금이라도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잡고 싶다. 일부 부족한 점은 있겠지만 이념에 휩쓸리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경제 정책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성과를 냈다. 반면에 김영삼·김대중·이명박 정부를 보면 초기에 확장 정책을 폈다가 임기 말에는 모두 좋지 않았다. -20쪽
그런데 ‘늘공(늘 공무원)’이자 보수적 정통 경제 관료였던 저자는 어쩌다가 개혁 색채가 진한 대통령과 한배를 타게 된 것일까? 대통령 후보 시절의 노무현과의 첫 만남을 저자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정치인, 국가 재정의 틀을 바꾸고 싶었던 경제 관료의 운명적 만남’이라고 평가한다. 두 사람의 화두는 ‘국민을 위한 재정을 만들자’는 단 한 문장이었다.
식사 중에 노 고문이 옆자리에 앉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국가 재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정말 국민을 위한 재정을 쓰고 싶습니다. 아이디어가 부족해 고민입니다.” 정치인에게서 ‘국민을 위한 재정’이란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이 일었다. 나는 ‘톱다운’ 방식으로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고 했다. “이건 정말 엄청난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시스템 자체가 그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노 고문이 짧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좀 할 수 있도록 해 봅시다.” -36쪽
‘국민을 위한 재정’을 구현하기 위해 만든 장기적 정부 계획서가 ‘비전 2030’이었다. 국민을 위해 재정을 쓰려면 국가가 돈을 어디에 써서, 나라를 어떻게 만들려 하는지 계획이 필요했다. 저자는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만드는 장기 계획서인 비전 2030 작업을 주도하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2030년 복지국가 대한민국’의 꿈을 그렸다. 그러나 원대한 포부는 이해받지 못했고 언론과 야당의 집중 포화를 맞으면서 비전 2030은 좌초되었다.
당장 야당과 언론은 물론 여당까지 들고 일어났다. “천국을 꿈꾼다” “환상이다” 하는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재원 논란이 크게 불거졌다. 2030년까지 1100조 원(물가상승 반영한 경상가격)을 투입한다고 한 게 화근이었다. 도박 게임 ‘바다이야기’에 빗대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이나 마찬가지라고 꼬집는 신문 만평도 있었다. -49쪽
“경제 정책은 이념과 색깔을 넘어서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그리기 위한 반성적 회고록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는 한미 FTA 협상 타결과 같은 성공한 정책은 물론, 비전 2030처럼 좌초한 정책까지 가리지 않고 담담하게 수록하고 있다. 실패한 정책에서도 반면교사를 찾자는 취지다. 저자는 또 회고록을 통해 ‘경제 정책만큼은 이념 대립을 넘어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한다.
다시 한미 FTA 협상 타결 직후다. 노 대통령이 불쑥 말을 꺼냈다. “이상하다. 왜 지지율이 상승하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비슷한 얘기를 했다. 나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아니, FTA를 타결하면 당연히 지지율이 올라가지 떨어질 리가 있나.’ 그런데 왜 노 대통령은 반대로 생각했을까. 그만큼 지지자들의 한미 FTA 반대에 노 대통령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 대통령은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손해를 감수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제 협상을 타결했으니 지지 세력이 확 떨어져 나가겠지.’ 그게 노 대통령의 짐작이었다. -73쪽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지지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가의 장기적 관점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한 사례를 회고하며 “내 인생의 20대부터 50대까지 줄곧 했던 일이 경제 정책 수립이었습니다. 경제 정책은 이념이나 색깔에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특정 진영의 논리로 경제 정책을 수립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단기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국민 전체의 이익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라고 책을 집필한 속내를 밝힌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판이하게 다른 정책으로 혼란을 겪어온 것이 우리 현실이다. 1973년부터 2007년까지 30여 년의 경제 정책 비화를 담은 이 회고록이 주는 성찰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