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폭발적인 책이 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깨부수기를.”
우리는 지나치게 자주 여자를 탓한다
전 세계적으로 거의 매일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하지만 대개 우리는 그 여자들의 이름조차 모른다. 언론에 머리기사라도 한 줄 실리는 경우는 극소수이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회는 이를 ‘극히 드문’ ‘물 흐리는 미꾸라지가 저지른’ ‘비극적인’ 일로 치부하고 사건들의 상호 연결성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시스템 차원의 해결책을 논외로 만들어버린다. 그리하여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건의 원인과 예방과 해결책은 또다시 여자의 몫이 된다.
가부장제의 억압을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하고 여자를 비난하는 일은 안전하고 쉽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여자들이라면 시스템을 바꿀 필요도, 누군가가 책임 질 필요도, 제도를 개혁하고 구조적 문제를 뿌리 뽑을 필요도 없다. 그 결과 여자들은 괴롭힘, 폭행, 강간, 살해에서 벗어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영국에서 세라 에버라드라는 여성이 실종된 후, 경찰은 집집마다 방문해서 절대 여성 혼자 외출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여자들이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남자들의 집을 방문해서 범인을 밝혀낼 때까지 외출하지 말라고 경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통계적으로 범인은 남성일 확률이 압도적이다.)
이 책에는 여자들이 자신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긴 대처법 목록이 실려 있다.(106~108쪽) 길을 걷다가 남자 무리가 있으면 반대편으로 가기, 혼자 살지 않는 척하려고 남자 목소리 녹음해두기, 여자친구들과 헤어진 후에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문자 보내기, 술집에서 손으로 술잔 위를 덮고 누가 내 술에 약을 타지 않는지 매의 눈으로 감시하기,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벽에 서 있기…… 여자들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습관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에게는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라는 점이, 여자들이 이렇게 불편하게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점과 점의 연결, 이것은 ‘독립사건’이 아니다
페미니스트 활동가, 작가, 강연자. 방송에서 남자 패널과 피 튀기며 토론하고,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여러 권의 페미니즘 책을 쓴 로라 베이츠 역시 성차별을 겪은 순간은 있었다. 정확하게는 ‘있었다’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목록이 인생 내내 뒤따랐다. 그러다 비슷한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점과 점을 연결했다.’ 이 사건들이 우연히 벌어진 독립사건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간 일상에서 흔하게 겪었지만 무시하려 애썼던 목록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삶이 공포, 학대, 괴롭힘, 차별로 얼룩지는 것이 정당한 걸까? 그래서 여자들에게 목록에 대해 물어보고 다니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아무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평범한 일상이니까요.”
마흔아홉 살 여자인 나에게는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많은 여자들이 용감하게 공개한 것 같은 끔찍한 성폭력은 아니고 그저 평생 남자들에게 괴롭힘당한 이야기다. 우선 나보다 어린 여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싶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말없이 참아서, 대부분 신고하지 않아서, 나에게 일어난 일을 소리 내어 외치지 않아서 미안하다. 침묵을 지킨 탓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이런 행동들이 당시에는 당연시되었고 친구들도 모두 겪은 일임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너무 당연해서 친구들끼리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거의 없다…… (29~30쪽)
이에 저자는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상이어서는 안 된다고,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이야기들이 모일수록 다양한 억압의 형태 간에 겹치는 부분, 즉 ‘교차성’이 명백해졌다. 여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사과하는 듯한, 의구심 가득한 말투를 사용했다. 여자들은 스스로를 믿지 않도록, 목록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도록 체계적으로 훈련받아왔다. 이것이 바로 아주 오랫동안 가부장으로 대표되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 사회 시스템을 통해 구축해놓은 억압이다.
“이제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내 목록을 써내려갈 것이다.”
2023년 7월, 대한민국 정부는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강화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스토킹 살해는 계속됐다. 전문가들은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살인 등 중범죄로 이어지기 쉬운 스토킹 범죄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피해자 보호 조치를 ‘피해자 스스로 판단하도록’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어떤 이들은 그래서 해결책이 뭐냐고 묻는다. 그 대답을 요구받는 것은 대부분 억압을 경험한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는 수십 년 동안 해결책을 제시해왔다는 사실이다. 단지 귀 기울이는 이가 없었을 뿐이다. 누구보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사실 남자들이다. 남자들을 끌어내리려는 게 아니다. 남자아이들은 독립적이고 강해야 하며, 감정을 내보이거나 연약함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정복하고 통제하고 지배함으로써 남성성을 증명하라고 교육받는다. 50세 미만 남자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데서 교육의 결과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우리 아들들이 시스템을 붕괴시키도록 키울 때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시급한 저항의 행동은 우선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 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누군가의 세계를 부수기 위해서, 연대하고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목록이 필요하다. 그러니 당신의 목록을 만들어라.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당신만의 이야기를 담은 목록을.
[추천사]
로라 베이츠가 처음으로 점과 점을 연결하던 순간, 이 책의 시초인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세계 각지에서 도착한 수만 개의 ‘목록’은 다양한 문화권에 사는 여성이 공통된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모두 다르다.’ 전 생애에 걸쳐 지속되는 폭력과 차별에 대한 목록은 함구하거나 묵살당한 모든 이야기,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하는 세상을 향한 저항이다. 좋은 책은 독자가 시급함을 깨닫고 행동하게 만든다. 이제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내 목록을 써내려갈 것이다. 침묵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기 바란다.
하재영 (작가,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저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자신의 ‘목록’을 떠올리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이 목록은 여성으로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어온 크고 작은 ‘평범한’ 성차별과 성폭력의 목록이자 그렇기에 감히 혹은 굳이 적어내려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억압의 목록이다. 하나의 의미 없는 점에 불과해 보이는 개인의 경험을 목록화하는 순간 일상의 착시에 가려졌던 성 불평등의 반복적 패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저자가 모아낸 20만명이 넘는 여성들의 ’일상 속 성차별‘ 목록은 서로 연결되며 그대로 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구조적 성차별‘의 지도가 된다. 당신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밖의 성별이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찾아온 거대한 백래시 앞에서 좌절했다면, 마음을 가다듬고 이 책을 펼칠 것을 권한다. 시스템을 바꿀 이유와 힘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연결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
울고 있는 여자에게, 미쳐 있는 여자에게 무엇이 그렇게 당신을 힘들게 했느냐고 물으면 여자는 말문이 막힐 것이다. 이걸…… 이걸…… 다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이 책은 그 여자를 위해 대신 말해주는 역할을 한다. 책에 담긴 세세한 성차별의 순간들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익숙할 테고 누군가에게는 깜짝 놀랄 만큼 충격적일 것이다. 이 폭발적인 책이 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어떤 사람들의 세계를 부수기를 바란다.
하미나 (작가,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