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어떻게 성립되어 어떤 우여곡절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는가?
웰스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이해하려면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유럽과 미국, 일본 등은 각국의 경제력을 배출할 판로가 필요했고, 이에 해외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제국주의 열강은 발칸과 근동 지역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때 대립의 주인공은 영국과 독일이었다.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가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동맹국과 협상국 간의 국제전으로 확전되어 개전 1주일 만에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열강이 참전한 대전쟁이 되었다. 영국은 식민지 병사의 희생과 해상전의 압도적인 우세로 승리했지만 이 전쟁에서 1,000만 명 이상이 살상되었고 종전 이후까지 유럽이 입은 상처는 실로 엄청났다. 도시는 폐허로 변했고 전염병과 식량 및 물자 부족으로 유럽 전역이 고통받았다(65장).
웰스는 이 책에서 전쟁을 “하려고만 했다면 피할 수 있었다”, “세계대전이 왜 시작되었는지가 아니라 왜 예방하지 못했는지가 더 궁금하다” 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웰스의 관심은 온통 세계의 운명에 집중된다. 그는 세상은 바뀌어야 하고 그러려면 민중을 교육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역저 《세계사 대계》와 이 책《H.G. 웰스의 세계사 산책》이다.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 책을 썼다”는 웰스는 세계가 어떻게 성립되어 어떤 우여곡절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여러 사건을 중심으로 쉽게 풀어냄으로써 누구라도 쉽게 세계 역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했다.
책 속에는 승자의 세계만이 아니라 역사를 함께 일구어온 수많은 인종과 전쟁에서 패해 역사에서 사라진 국가와 종족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깔려 있다. 저자는 역사를 완성하는 것은 일부 국가나 인종이 아님을, 과거의 역사를 딛고 바른 역사관을 가진 족속들이 세상을 발전시켜왔음을 보여준다. 세계 지성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역사서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과학의 눈으로 보고 소설가의 감성으로 풀어낸 균형 잡힌 세계사
이 시기의 많은 역사서는 정치가, 이상주의자, 군사 인물 등 ‘위대한 사람들’을 역사의 원동력으로 보았지만 웰스 식 역사 서술은 다르다. 그의 역사서의 특징은 서사이다. 인간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 것이다.
서술과정에서 책은 세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저자가 생물학을 전공하고 다윈의 진화론에 심취한 다윈주의자답게 생명과 지구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글을 시작해 이후 사회와 문명이 진화해 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따라서 독자는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지구의 탄생과 인류의 탄생 과정을 만날 수 있다.(1부, 2부)
둘째, 저자는 유럽 중심의 역사 서술과는 달리 동서양을 오가며 입체적인 인류사를 풀어낸다. 훈족과 이슬람 세력이 유럽에 미친 영향뿐 아니라 그들 내부 역사까지 살펴봄으로써 이들이 유럽에 변화를 가져오게 한 원인을 알 수 있게 한다.(34장, 40장, 43장, 44장)
셋째, 저자는 역사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역사 전체에서 각각의 시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고민하여 주요 사건들을 기록하고 이들을 꿰뚫는 인류의 지적·정신적 진화 과정에 주목한다(4부, 8부). 인류 문명과 인간 사회가 발전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는 물론이고 전체 역사에서 그것이 어떤 배경을 지니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정리해 주는 부분에서는 그의 뛰어난 통찰력이 빛을 발한다.
넷째, 무엇보다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던 웰스는 이 책이 소설처럼 읽히기를 소망했고 그런 노력이 책 전체에 반영되었다. 56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고 쉽게 읽힌다. 얕은 물 속 원형 생명체로 존재했던 생명들이 육지에 상륙하는 과정, 인간을 제물로 받치며 신을 모시던 원시인간들의 문명인으로의 진화 과정, 시리아와 아라비아를 떠돌던 셈족이 수메르를 정복하고 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우는 과정, 훈족의 아틸라가 유럽을 분열하는 과정 등이 흥미롭게 글을 풀어가는 웰스만의 전개 방식 덕에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게 넘어간다.
저자가 한 권에 세계사를 모두 담으려하다 보니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는데, 그런 부분은 이번 판본에 옮긴이 주로 보강했다. 또 이번 판본에는 최신 사진 이미지와 자료가 보강되어 최근의 역사 현장을 볼 수 있는 재미가 추가되었다.
100년 전 웰스가 보내는 우려와 경고
웰스는 문학 작품을 통해 미래 세계에 대한 경고를 계속했다. 탱크나 원자폭탄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이것이 전쟁에 이용될 것이라고 얘기했고, 라이트 형제가 비행시험에 성공하자 비행기를 이용해 폭탄과 가스가 살포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조화로운 국제 관계 속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미래를 꿈꾸었던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 책 끝부분에서 잘 드러난다(67장). 인류의 경쟁과 전쟁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자연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풍요와 밝은 미래만 가져다주는 것만은 아님을 밝히는 대목에서는 숙연함마저 느껴진다. 영국이 유럽공동체에서 탈퇴하고 국제 관계가 공존에서 독자생존으로 전환되는 이 시기에 그의 이러한 메시지는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