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는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섭식장애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봄날 문득, 햇살의 따사로움에 삶의 한 장면이 바뀌었다. 변하고 싶었다. 왜 나는 마른 몸매를 그토록 원했던 걸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식단일기를 기록하고 미술 심리치료를 시작했다. 치료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그동안 모른 척했던 내 본 모습을 발견했다. 본질은 마른 몸매의 예쁜 내가 아니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예쁜 여자가 되는 것보다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폭토를 멈추고 체중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자 했다.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힘들게 견뎠지만 섭식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폭식의 욕망은 사흘 밤을 새웠을 때의 졸음, 일주일 굶었을 때의 식욕처럼 자연스러운 신체적 본능이었다.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나약한 내 의지에 좌절감이 밀려왔다. 버티다 부러졌고, 달리다 넘어졌다. 의지만으로 변화에 이르기는 어려웠다. 억지로 폭토를 멈추고자 하는 강박을 내려놓으며, ‘먹는 즐거움을 다시 느끼고 싶다’, ‘멋진 사람이 되자’, ‘변하고 싶다’라는 마음만 남겨놓기로 했다. 그냥 도망치지 않고 하는 만큼 해보자고 나 자신을 다독였고, 반복의 두려움을 이겨내 보자고 용기를 내었다.
느리지만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폭토’의 조짐이 보이면 그 자체를 인정하고 그것이 지나간 다음의 마음을 지지해 주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나아갔고,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을 응원했다. 이렇게 시작한 작은 변화가 쌓여 성공의 고지에 다가섰다. 폭토의 주기는 점점 늘어났고, 마침내 멈추었다.
나를 섭식장애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한 작은 변화를 일으켰던 힘은, ‘꺾여도 그냥 하는 용기’에서 비롯했다.
실패를 인정하고 하루하루 작은 변화를 쌓아 섭식장애를 이겨냈다
섭식장애에 빠져 허우적대던 내가 변할 수 있었던 건, 의지가 꺾였을 때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변화의 방향에 대한 믿음에 기대어 ‘실패를 받아들이고 그냥 해보자’하는 태도로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얻은 사람들, 섭식장애와 같은 마음의 병을 이겨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냥 하는 마음’을 몸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인 박명수가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을 때, ‘꺾이지 않는 의지’보다 ‘의지가 꺾이더라도 그냥 하는 용기’가 더 중요하다는 뜻임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섭식장애와 같은 심리적 외상은 단번에 해결된다기보다 하루하루의 작은 변화가 쌓여 결국엔 치유에 이르게 되는 법이다.
작은 변화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처지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아는 데에서 시작한다. 내가 바라보는 나와 세상이 바라보는 나,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나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세상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내 욕망과 내가 처한 현실의 분명한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진짜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변화의 목적이 어떤 특정한 목표점에 당도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의 방식을 바꾸고 마음의 중심을 ‘방향’에 옮겨놓았다. 그 지점에서 욕망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고자 변화의 시동을 걸고 최선을 다해 변화의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단번에 해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패를 거듭하겠지만 믿고 나아가다보면 마침내 작은 변화를 마주했고, 그것이 쌓여 성공에 이르렀다.
편집자의 말
이 원고를 받아 들고 편집기획을 하면서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드러난 ‘섭식장애’를 메인 콘셉트로 설정하였다가, 편집을 마무리하면서 원고 속의 결론적 메시지인 ‘외상 후 마음의 성장’으로 방향을 새로 잡았으나, 독자에게 보다 더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마케팅 콘셉트를 잡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의지가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의 용기’를 메인 콘셉트로 결정했다. 섭식장애라는 원인과 외상 후 마음의 성장이라는 결과 사이에서 현실적으로 섭식장애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표면적인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치유와 회복 과정 속에 담긴 진심과 치열함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섭식장애는 내가 만든 감옥이었다
섭식장애는 자신이 만든 감옥이다. 열쇠를 손에 쥐고 있어도 열쇠구멍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구멍이 보인다고 무작정 열쇠를 꽂고 돌려본들 감옥문은 열리지 않는다. 상황이 두려워, 고통이 괴로워 단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굳은 의지를 세워보지만, 섭식장애라는 병증은 늘 그 의지를 꺾어버리고 만다. 섭식장애는 나의 문제, 나의 의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섭식장애를 겪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섭식장애 탈출은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다. 폭식과 구토를 멈추려 하기 전에, 내 마음이 고픈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마른 몸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라는 폭력성과 타인과의 관계 설정 오류로 인한 자존감 훼손, 마음 깊숙한 곳에 갇혀 있던 불안과 불만 등 심리적 정신적 상처가 섭식장애라는 방식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나약한 자신의 본모습을 인정하고, 마음 깊이 자리 잡은 고통의 뿌리를 제거해야 자아라는 열쇠구멍을 찾을 수 있다. 섭식장애는 의지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이다. 마음을 옮겨 자신을 직시하고 상황을 다르게 볼 용기가 필요하다. 그 과정은 느리고 지루하다. 하지만 마음의 방향을 잃지 않는다면, 한 걸음 한 걸음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마침내 섭식장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심리적 외상과 섭식장애의 고통을 현실감 넘치는 묘사로 드러내고, 강박과 중독의 지독함을 치유하며 심리적 외상에 의한 트라우마와 그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을 심리학적 해설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는 「꺾여도 그냥 하는 용기」는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자 하는 정예헌 작가의 진정성 어린 바람이 담긴 책이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가스라이팅과 폭력에 의한 최악의 연애로 얻게 된 마음의 상처와 오랜 고시공부로 인한 정서적 결핍, 그리고 가족과의 불화로 인한 스트레스는 외모에 대한 강박으로 이어져 결국 섭식장애의 굴레에 빠져버린 작가는, 자신을 섭식장애로부터 해방시킨 건, 굳건한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을 직시하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의지는 꺾일지라도 그 상태로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냥 해내는, 언젠가는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용기였다고 말한다.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의 용기이다.
‘용기’라는 열쇠, ‘자아’라는 열쇠구멍,
섭식장애 감옥에서 탈출하는 변화의 시작
섭식장애는 스스로 만든 감옥과 같다. 마음만 단단하게 먹으면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자신하지만, 누구도 의지만으로 그 굴레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마른 몸매에 대한 갈망이라는 티켓을 끊고 그곳의 입구에 들어서면 실제 모습보다 훨씬 자신을 뚱뚱하게 비추는 신체상왜곡 거울을 마주하게 된다. 입구를 지나면 다이어트라 불리는 첫 번째 방에 도착하는데 이곳은 비교적 탈출이 용이한 곳이다. ‘운동’과 ‘식단조절’이라는 관문만 통과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문은 길고 지루해서 ‘지방흡입술’이라든가 ‘식욕억제제’라든가 ‘먹토’라는 편법의 방에 한눈을 파는 경우가 생긴다. 다행히 마음을 다잡은 사람은 관문을 통과하여 다이어트의 방에서 탈출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먹토의 방 문을 열기도 한다. 먹토의 방에는 시시포스의 바위가 올려져 있는 체중계가 있다. 아무리 재도 체중계의 눈금은 간절한 바람을 외면한다. 입구를 지나면 나선형으로 이어진 맨 아래층까지 순식간에 떨어지는데 이곳에는 ‘부디 열지 마시오’라고 써 있는 좁은문이 있다. 간혹 이곳에서 강한 의지로 나선형을 기어올라 다이어트 방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에, 외부 충격에, 자기 비하에 마음을 다치고 체념한 대부분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 좁은문을 열고 만다. 맛의 기쁨을 반납하고 그곳에 들어서면 좁은문은 굳게 닫히고, ‘폭토’와 ‘씹뱉’, ‘뼈말라’와 ‘강박’, ‘우울’과 ‘무기력’으로 왜곡되어 방향과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섭식장애’의 방에 갇히고 만다. 그곳은 산해진미가 가득하지만 맛을 느낄 수 없는데다가 바로 옆에는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는 기괴한 곳이다. 폭식과 절식을 반복하던 어느 순간 그곳에서 탈출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미 그 좁은문을 통과할 수 없는 상태다. 앞으로는 폭식과 구토를 하지 않고 건강한 방법으로 빠져나가야 하겠다고 다짐하며 의지를 세우지만, 늘 실패를 되풀이하고 만다. 결국 반복되는 이 과정은 절망으로 이어지고 이곳은 심각한 심리적 지옥, 섭식장애의 지하감옥이 되어버린다.
정예헌 작가는 문득 ‘이 굴레를 벗어나는 건 의지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그 순간, 자신의 손에 든 ‘용기’라는 이름의 열쇠를 발견한다. 스스로 만든 감옥이었기에 그 감옥을 열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열쇠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이 그동안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흔적들이 보인다. 그 흔적들 사이로 ‘자아’라는 작은 열쇠 구멍이 보이고, 그곳에 열쇠를 넣고 돌린다. 작은 출구가 열린다. 출구 역시 너무 좁아 바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입구의 좁은문과는 달리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무리 의지가 꺾여도 그냥 그것 자체를 인정하고 용기를 내어 조금 열린 출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상쾌함에 마음을 맡긴다. 언젠가는 출구가 넓어질 것을 믿는다. 상쾌한 바람은 의지와 노력의 흔적에 스며들고, 점차 그 흔적들이 희미해지면서 출구로 나갈 필요도 없이 섭식장애라는 방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