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移住)와 이산(離散)의 공간
간도에 살다 간 ‘입체적’ 어머니들
강경애의 작품 세계를 이루고 있는 수다한 여성 인물 중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어머니’들이다. 온갖 어려움 아래에서 끈질기게 삶을 일구어나가는 강경애 소설 속 어머니들은 모성을 동력으로 삼는데, 이때 작가는 “출산과 양육을 신비화하거나 여성의 보편적인 자질로 추상화하지 않”으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덧씌운 이상적인 어머니 노릇, 주어진 모성성에 대한 통념을 우회적으로 비판”(작품 해설 「식민 시대 여성주의 리얼리즘의 성취」)한다. 납작한 모성 신화로부터 빠져나와 생생한 현실로 뛰어드는 그들의 ‘입체적’인 모성은 생존과 계급 투쟁에 대한 의지로도, 당세에 만연했던 부조리에 대한 고발로도 읽힌다.
당대 민중의 물질적ㆍ정신적 결핍을 깊이 있게 다룬 「소금」은 친자식들에 대한 책임감과 젖어미로서 키운 아이를 향한 그리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봉염 어머니를 등장시킴으로써 모성의 현실적인 국면을 보여준다. “산 사람은 먹어야” 하며 “그러구 살 도리를 또 해야” 한다는 용애 어머니의 말과 (검열로 인해 지워진) 무산자 계급의 단결과 결속을 강조하는 결말은 그 모성을 난국 타개의 물꼬로 변주하여 풀어내고자 한 작가적 시도로도 읽힌다. 한편 이번 중단편선의 표제작인 「지하촌」은 가사와 농사일이라는 이중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악착같은 모성애와 생명력으로 삶을 버텨내는 칠성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낙관적인 전망마저 불가한 극악의 현실을 환기한다.
강경애 작품 속 어머니들이 맞닥뜨리는 수난에는 당시 간도의 현실이 깊숙이 끼어들어 있다. 예컨대 「소금」의 봉염 어머니가 겪는 가족의 해체와 가없는 유랑은 항일무장운동 쇠퇴 이후의 간도 상황과 맞닿아 있고, 「모자」의 승호 어머니와 「마약」의 보득 어머니를 위기에 빠뜨리는 가부장의 부재 및 타락 역시 당시의 간도 정세에 기인한다. 이주와 이산을 거듭하고 작가 생활의 대부분을 간도에서 보낸 그의 생애를 고려해볼 때, 강경애는 식민지 현실의 비참과 이를 돌파하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간도라는 공간적 배경에 효과적으로 펼쳐놓았던 것이다.
허위와 가장의 얼룩 한 점 없도록……
폭로와 각성으로 닦아낸 성찰의 거울
차라리 이 붓대를 꺾어버리자. 내가 쓴다는 것은 무엇이었느냐. 나는 이때껏 배운 것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내 붓끝에 씌어지는 것은 모두가 이런 종류에서 좁쌀 한 알만큼, 아니 실오라기만큼 그만큼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저 한 판에 박은 듯하였다.
-「간도를 등지면서」(『동광』, 1932. 8)
수필을 통해 밝히고 있듯, 강경애는 문사(文士)로서의 역할과 소명에 비추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한 참된 지식인이었다. 허위를 물리치고 가장을 거부하고자 했던 작가의 치열한 고투의 기록은 그의 소설에도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부르주아 신여성의 허울을 신랄하게 풍자한 「그 여자」에서 주인공 마리아는 노동자 농민을 향해 ‘내 땅’ ‘내 동포’를 외치면서도 그들의 처지에 진실로 공감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미라’ ‘흡혈귀’와 같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견주어진다. 연설을 들으면서 곧장 밭의 소중함과 직접 겪어온 지주의 착취를 떠올리는 군중과 달리, 마리아는 그저 “자연미를 구경하는 호기심”과 “어떤 명작이나 하나 얻을까 하는 바람”으로 농촌을 바라본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강경애는 마치 서로 “딴 인종”처럼 느껴지는 이들 사이의 간극과 한계를 선명하게 짚어낸다.
작중인물의 후일담을 귀 기울여 듣는 여성 지식인 청자가 등장하는 「유무」와 「번뇌」 그리고 강경애의 자전소설 「원고료 이백 원」은 작가의 자기반성적 태도와 좀더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그는 특히 「원고료 이백 원」을 통해 사적인 욕망과 공동의 대의를 두고 벌어지는 여성 지식인의 내적 갈등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한편, 이를 “모던껄” “일류 문인” “입으로만 아! 무산자여 하고 부르짖는 그런 문인”이 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으로 매듭짓는다. 직접 번 돈으로 “평생의 원이던 반지나 혹은 구두나를 선선히 해 신”는 대신 동지들을 돕기로 결심하는 「원고료 이백 원」 속 ‘나’의 모습은 실제 강경애가 ‘성찰적 지식인’으로서 보였던 행보와 포개어진다. 글을 쓰는 문학인으로서 “참말 인생의 그 어느 한 부분이라도 진지하게 그려보았”(「유무」)는지 스스로에게 엄중히 묻는, 그럼으로써 다시금 결의와 각오를 다지는 강경애 소설 속 여성 지식인들의 진정성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마음에도 큰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