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 근현대건축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의 근현대건축: 다이어그램으로서의 역사』에서 건축사학자 정인하(鄭麟夏)는 후기구조주의의 시각 아래 그 과제에 도전하고 있다.
그동안 특정한 주제나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룬 한국의 근현대건축 이론서나 에세이, 건축가의 작품집 등은 어느 정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일관된 시각에서 건축적인 변모 과정과 주요 건축가들에 대한 연구를 종합적으로 담아낸 저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책은 저자가 1990년대부터 약 삼십 년에 걸쳐 쌓아 온 연구 성과를 엮은 것으로, 한국 근현대건축을 전체적으로 훑는 총론이자 그 시대를 살았던 건축가들의 각론이다.
세 가지 건축지형도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보다 적어도 한 세기 이상 늦게 시작되었으나 지난 세기 내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작용하며 건축과 도시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저자는 푸코가 건축 담론에서 이야기한 단층선(fault line)을 이십세기 한국 건축과 도시의 진행 과정에서 발견하면서, 이 단층선에 의해 역사적 흐름이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지적한다. 국가 권력의 작동 방식과 경제 구조, 도시화와 주거 문제, 재료와 건축의 생산 방식 등이 구조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단절을 경계로 한국 건축이 만든 ‘건축지형도’는 세 가지로 규정된다. 첫번째는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45년까지의 식민지 근대 시기, 두번째는 1953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의 소위 ‘개발 독재’ 시기이며, 세번째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근대화 정착기와 세계화 이행기이다. 이러한 시대구분은 서구 근대건축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 서술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의 현실을 최대한 반영한 결과이다.
건축의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가능성의 장과 다이어그램
세 가지 건축지형도 속에서 건축 담론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되며, 이에 따라 건축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진다. 본격적으로 책을 살펴보기에 앞서, 저자가 제안하는 두 가지 개념인 ‘가능성의 장(space of possibilities)’과 ‘다이어그램(diagram)’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여기서 ‘가능성의 장’은 물리적 환경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지배적으로 작용했던 외부적 조건을 가리킨다. 즉 기술적 사회경제적 가치는 건축가의 ‘바깥’에서 구조화되어 건축가의 의식과 실천을 한계 짓는 것이다. 오늘날 건축은 과거처럼 숙련된 장인들의 축조 행위로 정의되지 않으며 건축을 둘러싼 도시 구조, 법과 제도, 생산 방식, 미적 규범이 얽힌 지적 체계로 이해된다. 이들은 자본과 권력과 결합하며 가능성의 장을 형성하며, 건축의 의미는 여기에 대응하여 생산된다. 한편 ‘다이어그램’은 건축가의 의식으로부터 만들어진 독자적인 생성 규칙을 가리킨다. 다이어그램은 건축의 고유한 속성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현실화되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건축가들은 형태와 공간, 구조, 대지, 기능 등의 개념을 새롭게 배열하면서 자기 고유의 미적 체계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그 다이어그램은 간혹 매혹적인 새로움과 창의성으로 다가온다. 소수의 건축가들은 이미 확립된 규범으로부터 벗어나서 건축의 내부 요소들을 새롭게 조직하여 오히려 기존의 것을 허물어트리기 때문이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건축가들에게 가능성의 장은 타자로서 작용하며, 계속해서 그의 의식 내부로 밀려와서 주체화된다. 이에 비해 건축가들의 상상력과 욕망은 명백히 다이어그램을 통해 세계 속으로 펼쳐진다. 그것은 불완전하며, 기존의 구조를 무너트리고 변경시키며 새롭게 발산해 간다.”
한국 건축의 주요 다이어그램-비움과 채움의 상관성
한국 근현대건축사에서는 매우 의미있는 다이어그램이 부각되는데, ‘채움과 비움의 상관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건축가 내부의 다이어그램과 외부의 가능성의 장을 관통하면서, 또한 개념적 차원과 실제적 차원에서 동시에 맞물리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 건축에서 비어 있는 공간은 채워진 공간과의 상관적 관계를 통해 의미를 갖게 되며, 그 관계가 없어지면 비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마당’이다. 근대 이전까지 비움과 채움의 상관적 관계는 전통건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마당을 통해 이루어졌다. 여기서 외부 마당은 여러 건물과 관계 맺으며 고리 역할을 담당했다. 식민 시기에는 전통적인 공간 구조가 해체되며 마당에도 변화가 일어났으며, 도시형 한옥과 같은 주거 유형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 ‘비움’이라는 개념은 인구 밀도가 높고 거주할 땅이 항상 부족한 한국적 특수 상황에서 도시의 고밀화와 깊이 연관되었다. 저자는 현재 도시공간에 촘촘히 채워진 고밀도 건물들을 그 탐욕의 결과물로 진단하고, 한국의 현대건축가들이 주장한 비움을 도시공간의 고밀화와 상업화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 해석한다. 이처럼 도시공간이 건물로 채워질수록 비움에 대한 갈증이 더 커져 나갔다는 점에서 도시의 고밀화와 비움은 역설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이들은 시대적 구분을 떠나서, 그리고 건축, 주거, 도시를 관통하면서 근현대건축의 중요한 다이어그램으로 작용했다.
식민 시대부터 세계화 시대까지
총 20개의 장으로 구성된 책은 세 가지의 건축지형도를 기점으로 크게 3부로 나뉘며 각 부는 6-8개의 장으로 채워져 있다. 그중 한 건축가를 집중 조명하는 장을 각 부 끝에 2-4개 배치해 다이어그램 개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각 장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갖고 있으나, 주제의 성격에 따라 시기가 겹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건축물 및 건축가가 중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건축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입체적으로 포착되면서 한국 근현대건축에 대한 심화된 이해가 가능해진다.
1부 ‘개항과 식민 시대: 서구 근대건축의 수용’에서는 개항부터 해방까지 도시, 주거, 건축이 변화되는 과정을 다룬다. 특히 이 시기에 이루어진 건축 기술의 수용과 그에 따른 변화를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식민지배 후 일본은 국가 장치를 장악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설립하고 다양한 식민정책을 수행해 나갔는데, 이와 관련한 법령 및 연구 자료를 인용, 참조하여 도시계획을 비롯한 주요 사례를 소개한다. 일제강점기 도시와 건축 분야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주거 분야는 한국 건축가들이 독자적인 근대성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이 책에서는 한국 주거의 근대성을 이해하기 위해 박길룡(朴吉龍), 박동진(朴東鎭), 김윤기(金允基) 등을 비롯한 건축가들이 개진했던 주거에 관한 여러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중 박길룡은 식민 시기에 가장 뛰어난 활동을 펼친 한국인 건축가로 평가받는다. 한국의 전통 주거를 근대에 적합하게 개량하는 주거개량운동을 펼친 인물로, 5장 「박길룡: 주거 개선과 사회학적 건축론에서 그의 생각과 작품을 심층적으로 다룬다. 한편, 6장 「이상: 도시적 변모와 아방가르드의 탄생」에서는 이상(李箱)을 한국 근대건축사의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상은 문학가이기도 했지만, 김해경(金海卿)이라는 본명으로 살았던,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건축과에서 근무한 기수이기도 했다. 저자는 그의 초기 시들에 담긴 첨예한 모더니티의 정신세계를 조명함으로써, 비록 그가 남긴 실제 건축물은 없지만, 한국 근대건축에서 공백처럼 비어 있는 ‘근대성’의 연결고리를 발견한다.
2부 ‘개발 시대: 한국 건축의 정체성 탐구’에서는 해방과 전쟁, 분단이 가져온 상처를 치유하려는 복구 노력에서부터 고도성장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이 시기에는 냉전 제제에 따른 정치적 환경의 작용으로 전통 논쟁이 격화되었으며, 첨예한 논의들이 오가면서 건축적 정체성의 문제가 개발 시대 내내 주된 담론으로 자리잡게 된다. 기술의 발전 역시 당시 가장 중요한 추동체로 역할을 했으며, 이와 함께 기술적 담론과 건축 재료 생산에 대한 탐구가 이어졌다. 2부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건축가는 이희태(李喜泰), 김중업(金重業), 김수근(金壽根), 김종성(金鍾星)으로, 식민 시기에서 개발 연대로 이행되는 과정과 역동적인 개발 시대 전반에서 활동했던 그들의 작품 세계와 시대와의 관계를 살펴본다. 소위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 건축가라 불리는 이들은 외국의 앞선 건축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그들 건축의 정당성을 찾으려 했으며, 서구의 근대건축을 한국 사회에 정착시키는 데 집중했다.
3부 ‘세계화 시대: 건축으로의 다원적 접근’에서는 1993년 문민정부의 수립부터 지금까지 약 삼십 년간을 다룬다. 국내외에서 일어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한국의 건축가들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건축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단히 빠르게 진행되는 기술적 진보에 주목하여 이를 한국의 지역적 특수성과 결합시키고자 했다. 또한 과거 전통 논쟁처럼 건축의 이상성을 전통건축에 두지 않았으며, 현실을 건설 설계의 중심에 놓고자 했다. 현실을 바탕으로 설계된 건축물들은 모두 개별적이고 특이해서 한 가지 양식이나 경향으로 묶이기는 어렵다. 저자는 케네스 프램턴(Kenneth Frampton)이 정의한 비판적 지역주의의 열 가지 쟁점 중 일부를 빌려와 당시 국내외에서 중요한 활동을 펼쳤던 주요 건축가들의 작품과 함께 언급한다. 여기서 소개되는 건축가는 이타미 준(伊丹潤), 우규승(禹圭昇), 정기용(鄭奇鎔) 그리고 ‘4.3그룹’의 건축가들로, 건축가들이 어떻게 사회와 공공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또 인간 내면의 언어를 건축적으로 탐구해 갔는가를 정확하게 규명한다. 많은 동시대 건축가들 중에서 이들이 특별히 선택된 이유는, 한국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간 인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20장 「한국에서의 랜드스케이프 건축」은 비움과 채움의 상관적 관계가 2000년대 이후 건축과 결합했던 한국의 독특한 현상이라는 측면에서 마지막에 할애되었다.
내용과 관련된 건축물 사진과 도면, 그래프 등 시각 자료 345점을 글과 함께 수록하여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세밀한 부분까지 파악할 수 있도록 했으며, 필요에 따라 건축물, 건축가, 건축용어, 개념어 등을 선택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항목을 선정해 ‘찾아보기’에 실었다. 이 책의 근간이 된 저자의 연구 논문과 국내외 단행본들을 비롯해 관련 문헌들을 총망라해 ‘참고문헌’에 밝힘으로써, 좀더 깊이있는 연구가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