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최고의 여류 시인
우리말로 첫선을 보이는 이 책은 1555년 프랑스 리용에서 간행된 《리용의 여인 루이즈 라베의 작품집》 초판본에 수록된 헌정 서한과 시를 옮긴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리용은 프랑스 문화의 수도라 할 만큼 번영하던 도시였고,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이 출판업자를 만나기 위해 리용을 방문했다. 라베는 집 안에 큰 규모의 서재를 갖추고 당대 명사들과 교류하는 장소로 활용하며 자연스럽게 모리스 세브가 주도하는 ‘리용 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생전에 라베는 아름다운 외모와 무술, 음악, 시, 학문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선보여 많은 찬사를 받는 동시에 과감한 삶의 방식과 사랑에 관한 솔직한 표현으로 억측과 오해를 일으켜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초판본이 나온 첫해에 해적판이 나돌 만큼 높은 화제성과 명성을 누렸지만, ‘아름다운 유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수모를 감당해야 할 만큼 질곡을 겪었다.
다시 주목받는 루이즈 라베의 삶과 작품
루이즈 라베는 40여 년의 짧은 삶을 살고 떠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난 19세기에 이르러 샤를 생트뵈브와 페르디낭 브륀티에르 같은 대비평가의 주목을 받았다. 1918년에는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라베의 소네 작품들을 번역하여 간행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재조명일 뿐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루이즈 라베는 널리 알려진 이름이 아니었다.
르네상스 문학 연구의 권위자인 프랑수아 리골로가 ‘이 시인이 몇 편의 소네와 악의적인 전설로만 기억되고 있다’고 아쉬워한 때가 1985년이었다. 그 후, 20세기 후반부터 최근까지 루이제 라베의 삶과 작품에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번역서를 비롯해 연구 문헌이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어권을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출간되었고, 수많은 관심과 갈채를 받으며 읽힌다. 이제는 리용 학파의 대표자인 모리스 세브를 넘어서는 경의의 대상이 될 정도로 루이즈 라베의 위상이 현저히 높아졌다. ‘루이즈 라베 현상’이라는 표현까지 생겼다.
시대를 앞서간 사상과 순수한 영혼의 목소리
루이즈 라베가 최근에 이르러 이처럼 화려하게 재조명되고 재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된 19세기보다도 한참 전인 16세기를 살았던 라베는, 그때 이미 여성주의 관점에서 그 시대 다른 여성들에게 자신의 삶을 살기를, 학문 연구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데에 몰두하기를 독려했다. 이 책의 서문을 대신한 클레망스 드 부르주에게 바치는 편지에서도 드러나는 시대를 앞서간 그녀의 사상은 지금도 깊은 울림을 준다. 또, 사랑에 관한 솔직 대담한 표현으로 당대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그녀의 시는 이제 매우 완성된 순수한 영혼의 목소리라는 갈채를 받는다. 유려한 필치로 표현한 거침없는 욕구 속에서 발견되는 순수한 의지를 드디어 알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2021년에는 갈리마르 출판사가 펴내는 그 유명한 〈플레야드 도서관 총서〉 시리즈 중 한 권으로 《루이즈 라베 전집》이 나왔다. 프랑스학술원이 주도하는 2024년 국가기념리스트에는 루이즈 라베의 이름이 올라 있다. 프랑스교육부는 2024년 문학교사 자격시험 프로그램에 루이즈 라베의 작품을 포함하였다. 루이즈 라베의 시는 이제 명실상부 권위 있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정당한 평가를 받아 진작에 올랐어야 할 제자리를 이제야 찾았다.
초판본 원문과 함께 보는 루이즈 라베의 시
루이즈 라베의 시가 오랜 기간 여러 나라에 소개되지 못한 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현대 프랑스어와는 다른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번역 초고는 그녀의 시를 행을 건너뛰며 그저 느낌으로 이해하면서도 감동했던 역자가 르네상스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교재로 삼기 위해 우리말로 옮기면서 완성되었다. 초고를 완성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루이즈 라베의 위상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이때, 드디어 출간을 준비하며 다시 더욱 정교하게 우리말로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역자의 처음 의도대로 르네상스 프랑스어의 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초판본 원문도 함께 실어 마침내 국내 독자에게 첫선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