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하나의 완전한 형태로 도시 계획의 선례를 남긴 ‘북경(北京)
모든 도시는 탄생과 성장 그리고 번영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갖고 있다. 탄생한 날을 시작으로 사회적, 경제적 상황의 변화와 발전을 거치며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그리고 노년기의 여정에 오른다.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문명이 발달한 국가 중 하나로 중국은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수도인 북경 역시 오랜 역사를 가진 세계적 도시 중 하나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북경은 중국의 수도가 아닐 때가 있었고, 현재 북경시의 지리적 위치는 전통 시기의 북경성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북경은 중국 화북 평원에 형성된 거주지들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했다. 이후 점차 중국 북방의 중요 도시로 성장하였고, 복잡다단하고 기나긴 발전의 과정을 거쳐 중국의 정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그 역사적 시간은 몇백 년의 기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어쩌면 중국 역사의 시간만큼이나 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문자로 기록되어 고증이 가능한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면, 북경성의 형성은 3,00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는 이 성을 ‘계(薊)’라고 불렀으며 주(周) 왕실에 의해 분봉된 도성들 중의 하나였다. 진시황(秦始皇)은 중국을 통일하여 전제주의 중앙집권의 국가를 건설한 후 천하를 36개의 군(郡)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광양군(廣陽郡)의 치소(治所)를 계성(薊城)에 두었다. 진한(秦漢)에서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시기를 거치는 800여 년 동안, 중국 북방에서 계성의 지위는 점차 높아졌다. 수(隋) 왕조는 계성을 탁군(涿郡)의 치소로 삼았고, 당(唐) 왕조는 이를 유주(幽州)라 칭했다. 요(遼) 왕조는 계성을 배도(陪都)로 삼은 후 이름을 남경(南京) 또는 연경(燕京)으로 변경했다. 요 왕조를 이어서 등장한 금(金) 왕조는 정원(貞元) 원년(1153)에 정식으로 수도를 계성으로 옮기고 중도(中都)라고 했다. 원(元) 왕조는 이 중도의 교외 지역에 새롭게 성을 건설하고 이를 대도(大都)라 칭했다. 명(明) 왕조는 대도를 개조하여 새로운 성을 만들었는데 이때 북경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청(淸) 왕조는 명 왕조의 상황을 계승하여 수도를 북경에 두었고 이것은 중국의 전통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역사의 흐름으로 보면, 북경은 중국 역사의 초기부터 중국의 수도였던 것은 아니었고, 그 명칭이나 위치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며 도시의 규모 또한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결국, 지금의 북경은 하북 지역 거주지의 하나로 등장한 이후 발전을 거듭하며 이어온 역사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북경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작되어 발전을 이어왔을까? 어떠한 이유에서 해당 지역에 이토록 거대하고 아름다운 도시가 형성된 것일까? 또한 북경이 발전을 거듭하고 해당 지역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지리적인 환경 조건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까마득히 먼 선사시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자.